문지혁 ‘중급 한국어’ 출간
글쓰기 강사이자 미등단 작가의 자전소설
문학 강의 내용과 일상, 교차 서사의 재미
반복되는 일상 가치 깨닫는 어른의 성장사
"어떤 글이든 우리가 쓰는 글들은 일종의 수정된 자서전이에요. 우리가 쓰는 모든 글은."
장편소설 '중급 한국어'는 자전소설로서의 정체성을 이렇게 드러내며 시작한다. 미국 뉴욕의 한 대학에서 파트타임 한국어 강사를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초급 한국어'(2020)를 발표했던 작가 문지혁이 주인공 '문지혁'의 그후 이야기로 돌아왔다. 시간이 흘렀고 '문지혁'의 일상은 달라졌다. 신춘문예 등 공모전에 당선된 적은 여전히 없지만 출판사 투고로 책을 출간한 미등단 작가가 됐고 비정규직 강사로 한국어 대신 국내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친다. 학기 첫 수업, 자서전에 대한 설명은 이 작품에 대한 것으로 읽힌다.
소설은 '지혁'의 일상과 그가 하는 글쓰기 강의를 교차로 그려낸다. 일상과 강의 내용은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글쓰기를 여행에 비유한 강의를 보자. 인물이 비일상을 경험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미세한 변화가 생긴다고 '지혁'은 가르친다. 하지만 무엇이 비일상이고 일상인지, 모든 여행이 정말 미세한 변화를 일으키는 건지 모를 일이다. 뜯어보면 '지혁'에게 미세한 변화를 일으키는 지점을 비일상이라 칭하긴 어렵다. 어렵게 아이를 갖고 그보다 더 어렵게 아이를 키우는 하루하루, 엄마의 죽음이 불현듯 떠오르는 순간들, 책을 두 권 내고도 도무지 안정되지 않는 작가로서의 일, 스토리텔링에 밀려 글쓰기 수업이 폐지되면서 잃어버린 강사직 등 굴곡진 듯하지만 심상한 일상이 그를 매일 나노 단위로 성장시킨다. 그런 '지혁'이 더 '문학적'이고 독자에게는 위로다. 그렇게 문학과 삶은 포개져 있다.
딸의 탄생은 가장 중요한 변곡점이다. "먹이고 놀아 주고 치우고 재운다"를 반복하면 하루가 완성되는 일상은 "되풀이하는 것만이 살아 있다"는 깨달음에 닿게 한다. 익숙하고 지루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는 모든 일을 돌아본다. 떨어지고 거부당하고 혹평받아도 반복했던 글쓰기가 그에게 그렇다. "그러니 희망을 붙들지 말고 절망에 물들지 마세요. 그냥 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냥 살 듯이." 덴마크 작가 이자크 디네센의 말(Write a little every day, without hope, without despair·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 조금씩 써라)'을 언급하며 학생들에게 한 강의는 그 스스로에게 또 우리에게 하는 말이다.
주인공의 목소리로 전하는 문학 강의 내용 자체도 재미를 더한다. 카프카의 '변신'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 같은 문학작품을 통해 성장과 사랑, 죽음과 고통의 의미를 되새긴다. 예컨대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를 잃고 2년에 걸쳐 써 내려간 메모를 모은 '애도일기'에 대한 강의는 상실을 경험한 독자에게 가닿을 만하다. 점원과 다른 손님 사이의 가벼운 대화 속에서 어머니와 주고받던 단어 하나 '부알라'(voilà·여기 있다)를 듣고 슬픔을 발견하는 바르트. '지혁'은 학생들에게 예술과 애도의 공통점을 설명한다. 시간을 담는 작업인 예술에 요약은 허용되지 않기에 천천히 읽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 그건 애도도 마찬가지다.
열렬한 소설 팬이 아니라도 어려움 없이 읽어나갈 수 있다. 전작인 '초급 한국어' 추천사에서 이장욱 작가는 이를 뛰어난 가독성, 에피소드들의 감칠맛, 작가와 주인공의 가까운 거리감에서 비롯한 실감 덕분이라 해설했다. 이번 소설에는 그런 장점들이 한층 농익었다.
"그때의 나는 몰랐지만 지금의 나는 알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통찰, 깨달음, 더 나아가서는 내 과거에 대한 해석과 논평일 겁니다." 자전소설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나열하는 게 아니기에 공감을 끌어낸다. 방황하고 부유하는 청춘을 지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40대가 된 '지혁'의 일상을 엿보며 함께 시간을 통과해 온 느낌이 반갑다. 책을 덮고 나면 작가와 '지혁'의 또 다른 시간을 보여줄 '고급 한국어'를 드라마 다음 회차처럼 기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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