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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열사 동생 "아들 찾아헤맨 어머니 마음, 4·19 도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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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열사 동생 "아들 찾아헤맨 어머니 마음, 4·19 도화선"

입력
2023.03.15 04:0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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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열사 동생 길열씨 인터뷰]
모친과 형, 지난해 3·15 의거 참여자로 인정돼
모친 20일간 아들 찾아헤매 "모르는 사람 없어"
모친 생전에 "민주주의 위해 삼형제 바칠 수도"
길열씨 "모친 국가유공자 선정이 마지막 바램"

김주열 열사 동생인 길열(67)씨가 13일 경기 김포시 자택에서 가족사진을 들고 있다. 김길열씨 제공

김주열 열사 동생인 길열(67)씨가 13일 경기 김포시 자택에서 가족사진을 들고 있다. 김길열씨 제공


"행방불명된 형을 한 달 가까이 찾아다닌 어머니 사연을 마산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해요. 형을 사랑하는 어머니 마음이 4·19 혁명의 또 하나의 도화선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김주열 동생 김길열(67)씨


김주열 열사의 죽음은 1960년 3·15 의거 도화선이 됐다. 막냇동생 길열씨는 최근 국가보훈처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국가유공자로 등록해달라고 신청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1989년 사망한 모친 권찬주씨는 3·15 의거 62년째인 지난해 말에야 시위 참여자로 공식 인정을 받았다. 길열씨는 국가유공자로 인정받는 것이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다가 희생된 형의 뜻을 온전히 기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62년 만에 공식 참여자 인정에 기뻐"

김주열 열사 어머니 권찬주씨. 김길열씨 제공

김주열 열사 어머니 권찬주씨. 김길열씨 제공

제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해 11월 30일 권 여사와 김주열 열사의 친형 광열씨, 광열씨의 친구 하용웅씨 등을 3·15 의거 시위자에 포함시켰다. 어린 시절부터 김주열 열사 얘기를 전해 들은 길열씨는 "어머니는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셨고, 형(광열씨)은 시위 도중 주열이 형의 손을 놓쳐 잃어버린 것에 대해 평생 죄책감을 갖고 살다가 어머니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등졌다"며 "뒤늦게나마 어머니와 형이 시위 참여자로 공식 인정을 받아 기쁘다"고 말했다.

똑똑하고 착한 아들, 시신으로 떠올라

김주열 열사.

김주열 열사.

김주열 열사는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실종됐다. 그는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에 입학시험을 치기 위해 이모할머니 집에 머물던 열일곱 살 예비 고교생이었다. 권씨는 차남 김주열 열사와 함께 시위에 나섰던 큰아들(광열씨)로부터 "동생이 행방불명됐다"는 소식을 듣고 전북 남원에서 마산으로 달려왔다. 20일 넘게 아들을 찾아 거리를 헤맨 권씨의 애끓는 사연에 대해선 모르는 마산 시민이 없을 정도였다.

연못과 물탱크까지 뒤졌지만 끝내 아들을 찾지 못한 권씨는 남편이 위중하다는 편지를 받고 남원으로 돌아간 직후인 1960년 4월 11일 김주열 열사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올랐다는 소식을 접했다. '경찰이 김주열 눈에 포탄을 박아 죽였다', '돌에 묶어 바다에 던졌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고,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결국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권씨는 생전 4남 2녀 중 차남인 김주열 열사에 대해 "제일 똑똑하고 착한 아들이었다"는 얘기를 빼놓지 않았다. 길열씨는 "어머니는 생전 3·15 의거나 4·19 혁명 행사가 열린다고 하면 마산이든 서울 수유리든 어디든 꼭 참석했다"며 "주열이 형에 대해 가슴 아파하면서도 항상 자랑스러워했다"고 기억했다.

"마지막 바람은 국가유공자 선정"

김주열 열사 시신이 발견된 직후에도 경찰은 사건을 덮는 데 급급했다. 길열씨는 "경찰이 주열이 형 시신을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은 채 도립마산병원(현 마산의료원)에서 몰래 빼내 남원 선산으로 가져와 장례도 없이 매장했다"며 "경찰이 에워싼 채 매장해 가족들이 보지도 못했다"고 전했다. 길열씨는 "당시 어머니가 주열이 형 시신을 이기붕 집 마당으로 가져가 묻겠다고 했다. 그래서 경찰이 그랬던 것 같다"고 했다. 김주열 열사 가족은 전두환 정권까지 경찰의 감시 속에 살아야 했다. 권 여사는 감시를 피해 고향 땅도 떠나야 했다.

아들이 시신으로 발견된 한 달 뒤인 1960년 5월 8일 권씨는 마산 시민에게 "자식 하나 바쳐서 민주주의를 찾는 데 조그만 도움이라도 됐다면 남은 삼형제 다 바친들 아까울 게 있겠습니까"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면서 "존경하는 이 나라 어머니 여러분. 그리고 마산시민 여러분의 그 거룩한 뜻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길열씨는 "3·15 의거가 4·19 혁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역할을 했다고 본다"며 "늦었지만 국가유공자로 선정이 됐으면 하는 게 마지막 남은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김주열 열사 가족 사진. 어머니 권찬주(아래) 여사와 셋째아들 택열, 첫째 아들 광열, 넷째 아들 길열씨. 김길열씨 제공

김주열 열사 가족 사진. 어머니 권찬주(아래) 여사와 셋째아들 택열, 첫째 아들 광열, 넷째 아들 길열씨. 김길열씨 제공



이환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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