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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지 못한 건 어른들일지도

입력
2023.03.14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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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2일 서울 강빛초등학교에서 코로나19 유행 이후 마스크 착용 의무가 없는 첫 입학식이 열린 가운데 신입생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듣고 있다. 최주연 기자

2일 서울 강빛초등학교에서 코로나19 유행 이후 마스크 착용 의무가 없는 첫 입학식이 열린 가운데 신입생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듣고 있다. 최주연 기자

"이제 다 끝난 거 아닌가요? 새삼스럽게 코로나 얘기를."

학부모를 통해 담임교사에게 취재 요청을 넣고 기다리던 참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심드렁했다. 코로나 3년 교실의 빈자리를 스마트폰 게임으로 때우며 밤낮이 바뀐 은솔이의 학교 생활을 더 들어 보려던 노력은 거절당했다. 갑작스러운 연락이 부담스러웠을 수 있다.

그럼에도 "다 끝난 거 아니냐"는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학교 문이 열렸고, 마스크도 슬슬 벗게 됐으니까 다 괜찮아졌다는 걸까. 첫 기획 아이템부터 헛다리를 짚었나 싶어 머릿속이 복잡했다. 직접 아이들을 만나보기 전까지는.

불행하게도, 걱정은 새삼스럽지 않았다. 지난 한 달 한국일보 기획취재팀이 만난 아이들은 코로나 3년이 남긴 그늘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학교를 못 가는 사이 텅 빈 시간을 혼자 버티느라 외로움이 쌓여갔던 은솔이부터, 책상 없이 침대 위에 밥상을 올리고 원격 수업을 들으며 고군분투했던 지후, 양육 스트레스로 우울증이 심해진 엄마의 고통마저 떠안았던 성현이까지. 형편이 어렵고, 돌봄에 취약한 가정의 아이들에게 재난은 더 가혹했다.

아이들은 무기력한 눈빛과 스스로 상처 주는 모진 말로, 세상을 향한 공격성을 한껏 드러내며 힘든 마음을 제발 좀 알아 달라고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코로나 키즈, 마음 재난 보고서'는 어른들이 묻지도, 듣지도 않으려 했던 아이들의 목소리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작업이었다. 코로나가 야기한 재난은 끝나기는커녕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지난달 14일 서울 휘봉초교 6학년 학생들이 코로나 하면 떠오르는 것을 주제로 진행된 미술치료가 끝난 후, 직접 그린 그림을 들어 보이고 있다. 미술 치료는 '코로나 키즈, 마음재난 보고서' 기획 취재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최주연 기자

지난달 14일 서울 휘봉초교 6학년 학생들이 코로나 하면 떠오르는 것을 주제로 진행된 미술치료가 끝난 후, 직접 그린 그림을 들어 보이고 있다. 미술 치료는 '코로나 키즈, 마음재난 보고서' 기획 취재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최주연 기자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은 강했다. 일상이 흐트러지는 불안과 공포를 어른들이 모른 척하는 사이에도 아이들은 스스로를 지키려 애쓰며 버텼다. 아픈 동생을 돌보느라 지친 엄마를 먼저 위로할 줄 아는 은솔이는 누구보다 의젓했다. 늘 어둡기만 했던 지후는 할머니 앞에선 걱정 말라는 듯 먼저 웃음 지어 보이는 속 깊고 섬세한 아이였다. 성현이는 말썽쟁이로 소문났지만, 멀리서 온 기자들을 "선생님"이라 부르며 살갑게 챙길 만큼 마음의 빗장을 완전히 걸어 잠그지 않았다.

아이들은 또렷하게 외치고 있었다. "우린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소중한 걸 빼앗겨야 하냐"고. "억울하다"는 호통으로 어른들이 망쳐놓은 세상을 꾸짖었다. 어른들의 책임도, 할 일도 분명히 짚었다. 팬데믹이 다시 온다면 학교 문을 쉽게 닫지 말라고. 아이들의 목소리도 들으라고. 어른들은 어려졌다고 걱정했지만, 아이들은 코로나라는 척박한 토양 위에서 느리지만, 단단하게 자라고 있었다.

자라지 않은 건 어쩌면 어른들일지 모르겠다. 사회가 한 단계 나아가기 위해선 '복기'가 필요한데 기억하기보다 잊기 바쁘다. 재난을 겪으며 우리 사회가 챙겨야 할 약한 지점들이 또렷이 드러났지만, 앞으로 내달리는 데만 목을 맨다. 어리고 약하고 힘없는 존재들의 목소리는 무시해 버린 채. 어쩌면 아이들에게 진짜 재난은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빨리 잊자'고 다그치는 어른들, 우리 사회이지 않았을까.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요란법석인 시대다. 그럴수록 지금 있는 아이들의 안부를 더 묻게 된다. 지금 있는 아이들 한 명, 한 명 놓치지 않고 소중히 키울 수 있는 울타리를 더 튼튼하게 만들어줄 때, 미래의 아이들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재난 이후, 이제는 어른들이 자라야 할 때다.

강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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