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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 멈춘 '개∙고양이 치료용 혈액제제'... 20년간 관리 사각지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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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 멈춘 '개∙고양이 치료용 혈액제제'... 20년간 관리 사각지대였다

입력
2023.03.09 04:30
수정
2023.03.09 08:11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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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역본부 "동물혈액제제는 동물용의약품" 판단
민간업체, 지난해 말부터 혈액제제 공급중단
동물단체 "혈액?공혈동물 관리기준 마련해야"


동물혈액뿐만 아니라 공혈견, 공혈묘 등 공혈동물 역시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다. 펫버킷(petbucket) 홈페이지 캡처

동물혈액뿐만 아니라 공혈견, 공혈묘 등 공혈동물 역시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다. 펫버킷(petbucket) 홈페이지 캡처

개와 고양이도 수술이나 치료를 위해서는 수혈을 받아야 한다. 사람은 헌혈을 통해 혈액을 확보하지만 동물은 자발적인 헌혈이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동물에게 필요한 혈액은 공혈견(供血犬), 공혈묘(供血猫)를 기르는 민간기업으로부터 대부분 공급되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 말부터 국내 동물병원에 비상이 걸렸다. 국내 동물병원에 유통되는 개와 고양이 혈액 대부분을 공급하는 한국동물혈액은행과 관계사 KABB가 치료용 혈장, 농축적혈구 등 동물혈액제제 판매를 중단하면서다. 동물병원에서는 개와 고양이들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동물혈액제제 갑작스럽게 중단된 배경은

서울 서대문구 한 동물병원에서 개가 수혈받고 있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 서대문구 한 동물병원에서 개가 수혈받고 있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동물혈액은행은 2002년부터 공혈견과 공혈묘(2011년부터)를 기르며 생산한 전혈(혈액)과 혈장, 농축적혈구 등을 전국 동물병원에 판매해 왔다. 2021년에는 KABB라는 관계사를 만들어 한국동물혈액은행은 개 혈액을, KABB는 고양이 혈액을 각각 공급하고 있다.

동물혈액제제 공급은 지난해 말 동물혈액이 동물용의약품에 해당하는지 논란이 일자 농림축산검역본부가 '전혈을 제외한 동물혈액제제(생물학제제)는 동물용의약품에 해당된다'고 판단하면서부터 중단됐다. 약사법 및 동물용의약품 등 취급 규칙에 따르면 동물용의약품 판매를 위해서는 검역본부에 동물용의약품 제조업체로 등록하고, 필요한 시설과 기구를 갖춰 제조업 및 품목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한국동물혈액은행과 KABB가 이를 지키지 않은 게 그제서야 확인된 것이다. 이에 따라 두 업체는 지난해 말부터 전혈을 제외한 혈액제제 판매를 중단했다. 한국동물혈액은행 측은 "현재 전혈만 판매하고 있다"며 "혈장은 앞으로 허가를 받아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 도쿄 고이와 지역에 위치한 동물보호소인 알마에서 지내는 개 가호(왼쪽)는 혈액이 필요한 다른 개에게 혈액 120cc를 나눠줬다. 알마 블로그 제공

일본 도쿄 고이와 지역에 위치한 동물보호소인 알마에서 지내는 개 가호(왼쪽)는 혈액이 필요한 다른 개에게 혈액 120cc를 나눠줬다. 알마 블로그 제공

한국동물혈액은행과 KABB는 현재 각각 회사가 위치한 속초경찰서와 대구 특별사법경찰(특사경)에 약사법 위반 혐의로 고발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됐다.

한편 검역본부의 이번 조치와 관련해 수의사들과 동물단체 등은 물용의약품에서 전혈을 제외한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사람의 경우 전혈도 의약품에 포함돼 있는데 동물만 제외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검역본부는 "동물 의료용 혈액제제 관리방안 마련을 위한 현장간담회와 동물약사심의위원회 심의결과 등에 따른 것"이라고만 설명했다.

20년간 무허가 어떻게 가능했나

캐나다 위니펙에 위치한 비영리기관인 캐내디언애니멀블러드뱅크(CABB)는 헌혈견을 통해 캐나다 수의사들에게 혈액을 공급한다. CABB 홈페이지 캡처

캐나다 위니펙에 위치한 비영리기관인 캐내디언애니멀블러드뱅크(CABB)는 헌혈견을 통해 캐나다 수의사들에게 혈액을 공급한다. CABB 홈페이지 캡처

동물혈액이 허가대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한국동물혈액은행과 KABB는 "농림축산검역본부에 동물혈액을 공급함에 있어 별도 허가를 받아야 하는지 수차례 질의했으나 허가 대상이 아니라는 답변을 듣고 동물혈액을 공급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검역본부 측은 "동물혈액제제는 2000년 이후부터 약사법과 동물용의약품 등 취급규칙에 따라 동물용의약품 등 안전성·유효성 심사에 관한 규정(농림축산검역본부 고시)에서 동물용의약품(생물학제제)으로 규정하고 있다"며 "해당업체는 동물혈액제제가 약사법 등에 따른 허가대상임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반박했다.

그렇다면 검역본부는 왜 지금까지 두 업체를 감독하지 못했을까. 검역본부 동물약품관리과 관계자는 "허가를 내준 업체만을 점검하기 때문에 이들의 법 위반 사실까지는 알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검역본부가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개와 고양이에게 공급되는 혈액 품질 관리는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 것이다.

동물혈액 관리를 법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일 기회는 있었다. 2015년 한국동물은행의 공혈견, 공혈묘 관리체계가 부실하다는 지적(본보 2015년 9월 24일 보도)이 불거지며 크게 논란이 된 바 있다. 동물단체와 관계자들은 이때 한국동물혈액은행이 관련 허가를 받지 않았음을 검역본부가 인지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 당시 이를 확인하지 못했다면 그 역시 문제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검역본부 동물약품관리과 관계자는 "당시 관련 사항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동물혈액뿐만 아니라 공혈견, 공혈묘 등 공혈동물 역시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는 법적 구속력을 가진 공혈동물 사육 및 채혈 기준이 없다. 2017년부터 공혈동물의 관리 내용을 담은 동물보호법 일부개정안이 몇 차례 발의됐지만 입법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동물혈액∙공혈동물 관리 기준 마련해야

공혈동물은 다른 동물에게 피를 나눠주기 위해 사육되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관리는 업체 자율에 맡겨져 있는 상태다. EBS 방송 캡처

공혈동물은 다른 동물에게 피를 나눠주기 위해 사육되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관리는 업체 자율에 맡겨져 있는 상태다. EBS 방송 캡처

동물보호단체 비글구조네트워크(비구협)는 "두 업체가 공급하는 혈액의 안전성이나 유효성이 전혀 관리되지 않고 있다"며 동물혈액과 공혈동물 관리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비구협은 공혈동물을 실험동물법으로 관리할 것을 제안했다. 실험동물에 관한 법률 제2조에 따르면 '동물실험이란 교육∙시험∙연구 및 생물학적 제제의 생산 등 실험동물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실험'으로 규정돼 있다. 동물을 대상으로 한 혈액채취 및 혈액채취 후 가공은 생물학적 제제를 생산하는 일이므로 동물실험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비글구조네트워크는 공혈동물을 실험동물법으로 관리할 것을 제안했다. 게티이미지뱅크

비글구조네트워크는 공혈동물을 실험동물법으로 관리할 것을 제안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유영재 비구협 대표는 "동물혈액 공급 업체는 실험기관으로 등록하고, 동물실험윤리위원회를 설치 운영해 공혈동물의 출처와 사육관리, 공혈 과정 등의 관리가 윤리위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 대표는 "현장에서는 수혈이 필요한 데 혈액제제를 공급받지 못해 피해가 큰 것으로 안다"며 "위반 사항은 철저히 처벌하되 혈액 공급에 차질이 없도록 대책을 마련한 후 행정처분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비구협은 "동물의약품 등록 및 생산 허가를 받지 않고 임의로 살아 있는 동물의 혈액을 채취한 경우 동물학대로 간주될 가능성이 크다"며 한국동물혈액은행과 KABB를 동물보호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발할 예정이다.

고은경 동물복지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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