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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 시대, 문과 출신들의 절망

입력
2023.03.06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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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4일 서울의 한 대형서점에서 인공지능 챗GPT가 쓴 자기계발서 ‘삶의 목적을 찾는 45가지 방법’이 진열되어 있다. 이 책은 챗GPT가 집필·교정·교열을, 번역은 AI 파파고, 인간은 기획·인쇄·출판을 담당했다. 뉴시스

내 죽마고우는 심장내과 교수다. 그는 병원 근처에 살면서 주말에 응급콜을 받고 나가 스텐트를 삽입해 목숨을 구한다.

새벽잠과 휴일을 반납하며 사람을 살리는 그 선한 영향력은 숭고하고 존경스럽다. ‘사람 살린 기사 써봤냐?’고 자문할 때 나는 감히 ‘그렇다’고 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내가 저 하늘 같은 ‘의느님’을 향해서 우월하다 외칠 수 있는 재주가 하나 있는데, 바로 글쓰기다.(말도 더 잘하는 것 같다)

아니, 내세울 게 정말 그것밖에 없었나? 이렇게 물어보실 수 있겠는데, 바로 그 말씀이 옳다. 애석하게도 그게 전부여서다. 인문의 위상과 기여도가 급전직하하는 이 시대. 문과 출신에게 남은 자부심이 있다면 ‘인간·사회에 관한 고민과 해법을 통찰력 있는 글로 풀 수 있다’는 유의, 근거 없는 자기위안 정도일 테니까.

그러나 챗GPT의 등장으로 이젠 ‘글부심’조차 언감생심이다. 글 잘 쓰는 이과 인재 정재승 교수나 남궁인 전문의를 봤을 때 느낀 감정이 놀라움이었다면, 소설·에세이를 뚝딱 써내는 기계를 보는 심정은 자괴감이나 위기감 쪽에 가깝다

1997년 체스 최강자 카스파로프가 IBM 딥블루에게 무너졌을 때 바둑인들은 “우린 다르다”고 자신했다. 2016년 알파고가 인간 최고수를 이기자 기자들은 그걸 기사로 쓰면서 강 건너 불구경을 했다. 그 7년 후 인공지능(AI)은 글쟁이들 목에 칼을 겨누고 있다.

AI는 이렇게 인간 지성의 정수(精髓)를 하나씩 정복했다. ‘문송’(문과라서 죄송)을 넘은 ‘문망’(문과는 망했다)의 시대지만 한탄만 할 순 없다. AI 전문가 앤드루 응 스탠퍼드대 교수의 말에서 실낱같은 생존의 단서를 찾는다. “AI가 세상을 접수할 걱정을 하는 건 화성의 인구 증가를 걱정하는 것과 같다.”

AI는 앞으로도 인간의 확고한 지배 하에 있을 거란 얘기다. 그렇다면 챗GPT 시대에 우리가 통제할 대상은 AI의 능력이 아니라 그걸 쓰려는 인간의 ‘욕망’이어야 한다. 이제 인간은 누구나 100배 줌이 달린 스마트폰으로 초거대 AI에 자유롭게 접속하며 천리안과 닥터 스트레인지를 부하로 부린다. AI를 장착한 인간 개개인은 역사상 어떤 개인이 그랬던 것보다 더 치명적인 영향력을 자연, 사회, 다른 인간에게 행사할 수 있게 됐다.

AI 시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존재 의의는 여기서 찾아야 한다. 개인의 욕심이 AI의 힘을 업고 반사회적 행위로 증폭되지 않게 촘촘한 견제망을 고안하는 일 말이다. 종교·산업·기술혁명이 각각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수반했던 것처럼, AI혁명도 새 질서를 필연적으로 요구할 게 틀림없다. 우리는 새 질서를 만들고 또 실패한 뒤, 다시 시행착오를 거쳐 보완해 가야 한다. 그 질서를 설계·제작·유지하는 일에 철학·심리학·사회학·법학 등의 성과와 방법론이 쓰일 것이며, 그래서 문과의 멸망을 말하기엔 아직 이르다.

이 글을 읽다 보면 문과 출신의 또 다른 특징이 보일 거다. 누가 봐도 불리한 형세에서 아무런 데이터 없이 희망을 말하는 무근본 낙관론. 그게 바로 문과가 이 데이터와 확률의 시대에서 도태된 이유일 수 있겠지만, 사실 인간은 예로부터 미미한 가능성에 희망이란 날개를 달아 기적을 향해 날갯짓했던 다이달로스 같은 존재였다. 그런 인간이 AI 세상 주인공으로 남아있는 한, 인문의 효용이 쉽게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이영창 산업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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