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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 아이를 재우고 엄마들이 영화를 보기 위해 모인 사연

입력
2023.03.1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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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들의 영화 에세이 '우리 같이 볼래요' 낸 기혼 페미니스트 모임 부너미

편집자주

책, 소설, 영화, 드라마, 가요, 연극, 미술 등 문화 속에서 드러나는 젠더 이슈를 문화부 기자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 봅니다.

기혼 엄마 페미니스트 모임 '부너미'의 이성경(39) 대표, 최인성(37)씨, 정미진(41)씨, 정현주(40)씨가 새로 나온 신간 '우리 같이 볼래요'를 들고 지난 1일 미소를 짓고 있다. 서재훈 기자

기혼 엄마 페미니스트 모임 '부너미'의 이성경(39) 대표, 최인성(37)씨, 정미진(41)씨, 정현주(40)씨가 새로 나온 신간 '우리 같이 볼래요'를 들고 지난 1일 미소를 짓고 있다. 서재훈 기자

결혼 전에는 주말마다 극장을 들락거리며 평론가 추천 영화를 죄다 섭렵한 자칭 '시네필'이었다. 이젠 아이와 애니메이션 '주토피아'를 감상하기 위해 영화관을 가는 것만으로 감지덕지다. 끝이 없는 돌봄노동과 가사노동에 파묻혀 '영화 감상'은커녕 마음 편히 씻지도 못하는 '엄마'가 됐기 때문이다.

책 '우리 같이 볼래요(이매진 발행)'는 26명의 엄마들이 '82년생 김지영' 'B급 며느리' '우리의 20세기' '가족의 탄생' 등 결혼과 돌봄, 가정에 대한 영화를 '엄마 관점'으로 감상하고 합평한 결과물을 모은 에세이집이다. 기혼 페미니스트 모임 '부너미'가 기획했는데,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2019)', '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2020)'에 이어 기혼 여성의 다양한 삶을 들여다본 부너미의 세 번째 책이다.

엄마들은 이 한 권의 책을 내기 위해 2021년 내내 1, 2주마다 밤 10시만 되면 모니터 앞에 앉아 비대면으로 만났다. 짬짬이 본 영화를 보고 감상을 나누기 위해. 경북 영주에서 글쓰기 워크숍도 진행했다. 1박 2일은 엄마들이 가족 눈치 보지 않고 낼 수 있는 최대의 휴가였다. 이들은 왜 이렇게까지 하며 썼을까.

지난 1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저자 중 일부인 이성경(39) 부너미 대표, 정미진(41)씨, 정현주(40)씨, 최인성(37)씨를 만나 물었다. 이들은 각각 결혼 9~12년 차로 초등 진학 전후 나이의 자녀를 기르고 있다.

엄마의 목소리는 왜 들리지 않는 걸까

'우리 같이 볼래요?'를 함께 쓴 부너미의 여성들이 1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서재훈 기자

'우리 같이 볼래요?'를 함께 쓴 부너미의 여성들이 1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서재훈 기자


"우리 사회에는 출산을 겪은 몸을 둘러싼 오해가 너무 많다. 엄마의 몸은 고통을 이겨내고 생명을 지킨 모성의 상징이거나, 모유 생산지이거나, 백일 다이어트 비법의 결과물이거나, 안쓰러운 동정의 대상일 뿐이다. 거기에 진짜 우리는 없다. 줄곧 궁금했다. 출산의 고통이나 몸의 변화에 관해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왜 이렇게 들리지 않는 건지. (84, 85쪽)"

_어떻게 엄마들이 모여 영화를 보고 글을 쓸 생각을 했나요.

이성경(이하 이)="결혼 생활 중 가사나 육아 부담 측면에서 이해되지 않는 점이 많았어요. 남편한테 얘기를 해도 저만 예민하고 불만 많은 사람이 되더라고요. 기혼 여성의 불만은 집 안에만 머무르기만 하는 경향이 있어요. 2017년에 온라인 매체에 제가 느낀 결혼 생활의 부조리를 글로 썼다가 큰 반향을 얻고 깨달았죠. 글의 힘이 굉장히 세다는 것을. 그 길로 엄마들과 글을 써야겠다 생각했죠."

엄마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면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맥락이 드러난다. 이혼한 싱글맘 가정에서 자라는 소년의 성장기를 담은 영화 '보이후드(2014)'는 그 자체로 훌륭한 서사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왜 주변부에 존재하는 엄마의 삶에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을까. 이혼 3년 차의 한 엄마는, 책에서 아이들을 위해 전남편과 원만하게 지내려 노력 중인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와 함께 엮어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을 다룬 'B급 며느리'를 시어머니 입장에서 해석한 색다른 텍스트는 어떠한가.

_선정된 영화들은 어떤 기준으로 고른 건가요. 1년 내내 1, 2주마다 밤 10시에 모여 합평을 했다고요.

이="엄마들이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로 쉽게 볼 수 있는 영화여야 했어요. 20대 때는 주말마다 영화나 연극을 보러 다녔죠. 그런데 지금은 7년 만에 이벤트처럼 영화관에 가는 정도예요. 모임 시각이 밤 10시인 이유도요. 퇴근하고 아이들 저녁 먹이고 씻고 재우고 나면 그 시간이기 때문이죠."

정현주(이하 정)="비대면 회의 프로그램으로 모였는데요. 아이들이 잠들지 않으면 화면을 끄고 청각으로만 참여하기도 하고, 아이를 데리고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이="한번은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 선생님에게 요청해 강의를 듣는데, 밤 10시에 초청을 했잖아요. 선생님께서 "강의를 많이 해 봤지만, 밤 10시에 초대하는 곳은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많은 일정을 조정할 수 없고, 강사에 맞출 수 없을 정도로 엄마들은 '시간 빈곤자'예요."

그럼에도 '엄마 이야기'를 쓰는 이유

책에는 구구절절한 엄마들의 '포기' 사연이 등장한다. 페미니즘이 확산하고 있다지만, 집 안에서 이들이 벌이는 투쟁은 여전히 외롭고 처절하다. 가정에 고립된 목소리는 쉽게 세상에 드러나지 못한다.

"출산 전에는 일을 택하는 기준이 단순했다. 내가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거나 보수가 좋으면 거리낌 없이 뛰어들었다. (...) 아이를 낳은 뒤로 내 커리어는 단발적인 일들로 채워진다. 내 시간은 언제나 가족의 스케줄이 침범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59쪽)" "나는 살면서 직업란에 '주부'라고 쓰게 될 날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전업주부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협상력을 완전히 잃었다.(166쪽)"

_기혼 유자녀 여성으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모성애와 희생 같은 키워드로 '엄마'를 읽는 텍스트는 많지만 실제 엄마들의 삶과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최인성(이하 최)="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으면 직장에서 '저 사람은 일을 온전히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따라붙어요. '2등 시민'이 된다는 것을 요즘 뼈아프게 느끼고 있어요. 여성이 아이를 돌보면서 사회적으로 1인 몫을 하기 어려운 분위기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라는 것은 문제죠. '한 명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것처럼, 여성 혼자서는 절대로 양육할 수 없고 공동양육자나, 더 나아가 공동체가 필요해요."

정미진(이하 미)="일을 그만두고 정규직을 가져볼 생각을 단 한 번도 못했어요. 항상 비정규직을 전전했죠. 가정 내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커졌다고 하지만 굉장히 사적인 영역에 불과해요. 사회 전체적 맥락에서 과연 여성의 목소리는 커졌을까요."

최="5년 전에 엄마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아이가 아닌 '엄마 중심'의 웹진을 만든 적이 있어요. 엄마 당사자들이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신기하게도 결혼을 아직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은 분들이 무척 궁금해하는 거예요.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사는 삶에 대해 아무도 말해주지 않으니, 그 삶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거죠. 모두가 다 알고 이 길을 걸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결혼과 출산 관문을 지나면 어떤 삶을 맞닥뜨릴지 알고 선택해야, 자기의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_궁극적으로 부너미 활동을 통해서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나요.

이="책을 낸다고 해서 대단한 돈을 벌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다음 세대나 결혼·출산의 길을 아직 가지 않은 이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간절하게 있었어요. 엄마들이 눈치 보고 죄책감 갖지 않으면서 즐겁고 당당하게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어요. 사회가 엄마의 어려움을 보상해 주지 않거든요. 나의 에너지는 한정돼 있기 때문에 엄마의 행복에 자원을 많이 썼으면 좋겠어요."

정="책의 제목이 '우리 같이 볼래요?'인 이유는 다른 이들을 초대하고 싶어서예요. 어떤 책이나 영화를 봤을 때, 엄마들이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집중해 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었어요."

최="'기혼 유자녀 여성'이 되면서 강요받는 새로운 관계와 역할에서 여러 기쁨과 고통이 생겨요. 그 가운데 나를 계속 돌아보게 되죠. 글을 쓰면서 꼭 '뭔가를 하세요'라고 말하고 싶진 않아요. 그러나 관계 안에서 괴로워만 하기보다, 이 작업을 통해서 나를 잃지 않을 수 있었죠. 다른 여성들도 아내, 엄마, 며느리 같은 역할을 요구받지만 무엇보다 '나를 지키면서 사는 삶'을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같이 볼래요?ㆍ부너미 지음ㆍ이매진 발행ㆍ224쪽ㆍ1만5,000원

우리 같이 볼래요?ㆍ부너미 지음ㆍ이매진 발행ㆍ224쪽ㆍ1만5,000원



이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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