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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새는 실험실, 알바 뛰는 교수... '등록금 동결 15년' 추락하는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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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새는 실험실, 알바 뛰는 교수... '등록금 동결 15년' 추락하는 대학

입력
2023.03.03 04:3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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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수도권 대학까지 재정난... 공과금 낼 돈 없어 추경 편성도
"장기 계획 세워 미래 투자 불가능… 인재 양성 무슨 수로"
교육 인프라 투자 70% 급감, 실질 연봉 깎인 교수들 학교 떠나
"학생 피해 심각"… 외부 평가서 국내 대학 곤두박질

2월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앞에서 전국대학학생회네트워크 학생들이 2023년도 학부 등록금 인상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2월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앞에서 전국대학학생회네트워크 학생들이 2023년도 학부 등록금 인상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의 A사립대는 지난달 급하게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했다. 최근 30% 가까이 치솟은 전기·수도·가스요금 등 공과금을 낼 여윳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대학은 연간 약 100억 원의 공과금을 납부해 왔는데, 30억 원가량을 더 마련해야 했다. 예상치 못한 지출을 메우기 위해 결국 다른 사업 예산을 끌어와야 했다. 이 대학의 B총장은 "당장 눈앞에 닥친 공과금을 내려고 사업 예산으로 돌려막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장기 계획을 세워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등록금 동결 15년, 고육지책 난무하는 대학가

'반값등록금' 논란이 시작된 2009년 이후 15년째 대학 등록금이 동결되면서 지방대는 물론, 서울과 수도권 주요 대학들까지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다.

2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최근 서울의 C대학은 비용 절감을 위해 교수들에게 강의실과 연구실 온도를 낮춰달라고 공지했다. 이 대학은 정년퇴직·이직 등으로 교수진 공백이 생겨도 전임교수를 뽑는 대신 강사로 대체한 지 오래다. 단과대 학장들은 "동문들에게 기부금을 받아내는 게 주요 업무"라고 한탄했다. 수십 년 된 낡은 건물을 새로 짓거나 리모델링하려면, 예산의 절반 이상을 동문들의 기부금으로 충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울의 D대 총장은 "정부가 첨단 산업 인재 100만 명을 양성하겠다고 하는데,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무슨 수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인재를 길러내겠느냐"며 "지금 대학의 현실을 알지 못한 채 장밋빛 미래만 그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픽=강준구 기자

그래픽=강준구 기자


공사 사라진 캠퍼스, 8년 새 건설 지출 70% 급감

수도권 소재 E대학의 교수는 최근 동문회에서 겪었던 일화를 들려줬다. "80년대 초반 학번 선배들을 만났는데, 자신들이 학교 다니던 시절의 건물이 아직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것이 반갑기는 하지만 좋다고 해야 할지 안타까워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더라"라며 "그 건물에서 내가 연구하고 강의하고 있다"고 했다. 완공된 지 40년이 넘은 그 건물은 이후 단 한 차례의 리모델링도 이뤄지지 않았다.

실제로 대학가에선 수년 전부터 공사가 사라졌다. 2000년대만 해도 대학들이 시설 확장 경쟁을 벌이면서 캠퍼스가 공사판으로 변해 "소음과 먼지 때문에 공부에 지장이 크다"는 민원이 제기될 정도였고, 2010년대엔 대학평가를 잘 받기 위해 교사(校舍·학교 건물) 확보율을 높이려는 공사가 이어진 점을 감안하면 큰 변화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에 따르면 전국 사립대의 건물 신·증·개축을 위한 지출인 '건설가계정'은 2012년 1조1,115억 원에서 2020년 3,359억 원으로 70% 급감했다. 건물 노후화에 따른 감가상각비 적립 기준액과 대학이 실제 적립한 건축기금 간의 격차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규정에 따라 확보해야 함에도 적립하지 못하고 있는 액수는 2010년 3,492억 원에서 2020년 8,972억 원으로 2.5배 이상 늘었다. 재정이 악화한 대학들이 기본적인 건물 유지·보수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의미다.

"교수 임용 후 수년간 실험실 배정 못 받는 건 비일비재"

대학의 재정 악화로 직격탄을 맞은 건 교수들이다. 수도권 F대 이공계 G교수는 "좋은 장비는커녕 건물이 낡아 장마철이면 실험실에 비가 샌다"고 했다. 이공계 실험실은 항온·항습 유지가 기본인데, 이 대학은 예산 문제 때문에 제대로 된 보수공사 대신 방수처리로 '땜질처방'만 하고 있다.

국내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미국에서 박사후 연구원(포닥)을 마친 G교수는 33세 때 교수로 임용됐다. 한창 연구 의지가 뜨거울 때였는데 대학에서 실험실로 내준 곳은 캠퍼스 밖의 낡은 건물이었다. 교내에 공간이 부족해 마련해 준 건물이었는데 냉난방은커녕 소음 때문에 실험을 하기엔 부적합했다.

결국 G교수는 학부 시절 선배였던 인근 대학교수를 찾아가 실험실을 빌려 써야 했다. 그는 "선배 역시 비슷한 상황을 겪었기에 흔쾌히 받아줬고, 그렇게 꼬박 2년간 선배가 없는 시간에 남의 학교에 가서 연구하고, 다시 돌아와 강의하는 생활을 했다"고 설명했다. G교수는 "이런 일은 최근 몇 년간 임용된 교수들에겐 비일비재하다"며 "예전엔 대학교수가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연구 여건도 열악하고 교권마저 위태로워 마치 서비스직처럼 변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미국 시사주간지 US뉴스의 세계대학순위

미국 시사주간지 US뉴스의 세계대학순위


"11년 전 대기업 박사 초봉, 포닥 후 6년 차 교수 연봉보다 많아"

연구 여건 외에 교수들이 자괴감을 느끼는 부분은 연봉이다. 교수들은 등록금 동결 이후 연봉 인상률이 매년 0.5~2% 수준에 불과하다고 했다.

H교수는 2012년 박사 졸업 후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퇴사한 뒤 미국에서 포닥을 거쳐 2017년 국내 대학교수로 임용됐다. 지금은 대학을 옮겨 교수 6년 차다. 그는 "공부한 기간은 더 늘었는데, 11년 전 대기업에서 받았던 초봉이 지금 교수 연봉보다 많다"고 했다. 또 다른 이공계 교수는 "삼성전자 대졸 신입사원의 인센티브 합산 연봉과 교수 연봉이 비슷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교수들이 기업이나 처우가 좋은 대학으로 눈을 돌리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다. 서울 소재 한 사립대 총장은 "공무원처럼 호봉에 따라 5%씩 연봉이 오르는 국립대 교수와 달리, 사립대는 교수 연봉을 올려줄 여력이 안 돼 기업으로 가는 경우도 많다"며 "학교를 떠나겠다는 교수를 잡을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픽=강준구 기자

그래픽=강준구 기자


교수들 부수입 찾아 외부 활동, 저술 실적은 12년 새 30%↓

서울의 사립대 I교수는 "대학의 재정난은 학생들의 피해로 귀결되기 때문에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제자리걸음인 연봉 탓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교수들은 강의와 연구 대신 부수입을 올리는 데 열심인 경우가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대표적인 게 기업 사외이사 활동이나 외부 평가·심사·자문 등이다. 코로나19 이후 학생들이 벌인 등록금 반환 투쟁은 교수들의 외부 활동이 늘어난 데 따른 강의 질 저하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연구 실적과 대학 평가에서 한국 대학 교육의 질적 하락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국연구재단의 대학연구활동 실태조사에 따르면 4년제 대학 교원의 저술 실적은 2009년 6,733건에서 2021년 4,608건으로 30% 이상 줄었다. 미국 시사주간지 US뉴스가 연구실적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세계대학순위에서도 최근 5년간 국내 대학은 서울대만 128~130위를 유지했을 뿐, 국내 2위인 성균관대는 2019년 188위에서 올해 263위로 하락했다. 순위권(2,000위)에 오른 국내 대학은 지난해 50개교에서 올해 40개교로 줄었고, 전년보다 순위가 상승한 곳은 11곳에 불과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 평가에서도 국가경쟁력은 2011년 22위→2015년 25위→2021년 23위로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대학교육경쟁력은 같은 기간 39위→38위→47위로 최근 급락했다.

김경준 기자
홍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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