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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교육' 빙자한 인격모독… 어디까지 허용되나요?

입력
2023.03.02 04:3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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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월급쟁이의 삶은 그저 '존버'만이 답일까요? 애환을 털어놓을 곳도,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막막함을 <한국일보>가 함께 위로해 드립니다. '그래도 출근'은 어쩌면 나와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노동자에게 건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담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 이미지. 게티 이미지 뱅크

직장 내 괴롭힘 이미지. 게티 이미지 뱅크

#1. "진짜 답답해 죽겠네. 내가 그런 거 물어봤어? 못 알아들어? 그런데 왜 헛소리를 하지?" 서울에 거주하는 직장인 A씨는 2년째 팀장에게 업무 보고를 할 때마다 이처럼 공격적인 언행에 시달리고 있다. 새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장단점을 설명하는데, 세부 사항을 설명할 틈도 없이 비난이 쏟아진다. 약 40분간 진행된 이날 회의에서도 A씨의 팀장은 사소한 표기부터 문체, 말투까지 시종일관 꼬투리를 잡았다. 실수가 발견되면 길게는 10분가량 비난을 늘어놓는다.

#2. 아동 교육 기관에서 근무하는 B씨도 상사의 공격적인 행동에 근무 의욕이 떨어지고 있다. 직원 수가 20명 안팎인 기관에서 근무하는데, 팀장이 업무 회의 때마다 직원들에게 감정적인 비난을 쏟아낸다. 보고서를 가져가면 핵심적이지 않은 실수를 끄집어내 비난하고 업무가 미숙하다며 비아냥댄다. 수개월간 지속된 폭언에 팀장 전화가 오면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두근거린다는 직원도 있다.

“업무 모욕 듣다 보니 꿈도 사라져”

직장 내 괴롭힘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직장 내 괴롭힘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A씨와 B씨 사례는 직장인이라면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경우다. 표면적으로는 욕설이나 명백한 인격 모독성 발언은 없다. 사적 심부름을 시키는 등 업무 외적으로 부당한 지시를 한 것도 아니고, 신체적인 폭력을 가하지도 않았다. '질문한 것에 정확히 답하라' '표기를 정확히 쓰라'는 요구만 분리해서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러나 피해 당사자들은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한다. A씨는 우울 증세 탓에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상태이고, B씨 회사 직원들은 공황장애를 호소하고 있다. 표면적인 말 이면에 지나치게 공격적인 정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상대를 인격모독하지 않더라도 모욕을 내포하고 있으며, 피해자도 모욕당하는 기분이 든다. 무엇보다 이 같은 행위가 일상적으로, 수개월간 지속됐다.

게다가 이런 모욕은 노동자의 근무 의욕을 꺾고 추가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것도 가로막는다. 지난해 서울상담심리대학원 연구에 따르면, 사회생활 초년기에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면 사회적 상호작용에 불안을 느끼는 정도가 크게 높아진다. A씨도 "이 회사로 이직하기 전에는 업무 자신감도 있었고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도 원만했다"며 "이젠 '혼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뿐 원래 내가 원했고, 잘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도 잊게 됐다"고 했다.

지난해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시민 1,000명 중 194명(19.4%)이 직장 내에서 모욕·명예훼손을 경험했다. 괴롭힘 사례 중 가장 큰 비중이다.

“직접 욕설 없어도 모욕감 주면 괴롭힘”

직장 내 괴롭힘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직장 내 괴롭힘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그러나 A씨와 B씨 모두 이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회사에 신고할 수 없었다. B씨는 "실제로 업무에서 실수를 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폭행을 하는 등 상사가 명백한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다"며 "회사에서 신고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무작정 참고 있다"고 했다.

현행법상 직장 내 괴롭힘은 회사가 주 처리 주체다. 사용자(사장 등)가 괴롭힘 가해자일 경우 노동청에 직접 신고할 수 있지만, 노동자 간 괴롭힘은 회사에 먼저 신고해야 한다.

회사는 취업규칙 등에 따라 징계 절차를 정하는데 취업규칙이 모호하게 작성된 경우가 많아서 사내 구성원의 성향에 따라 처분이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 직장갑질119가 2021년 6월부터 1년간 접수받은 제보 사례에 따르면, 전체 사내신고자(257명) 중 보호조치를 받은 사람은 25.3%(65명)에 불과했다.

정부도 이런 상황에 대응하긴 했다. 2021년 10월부터 노동자의 신고에 회사가 적극적으로 조치하지 않는다면, 노동자는 지방고용노동관서에 신고해 판단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노동청은 시정조치나 5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처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피해자의 권리를 구제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고용노동부는 2021년 10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총 3,208건의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받았는데, 이 중 481건만 회사가 처리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봤다. 그중 과태료가 부과된 건 82건에 그쳤고, 387건(80.5%)은 시정지시로 끝났다.

수원지법, 2년간 모욕 방치한 회사에 “1,200만원 배상”

직장 내 괴롭힘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직장 내 괴롭힘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이런 현실과 별개로 노동 전문가들은 법리적으로는 A, B씨 사건 모두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고 입을 모은다.

우선, 발언이 업무 범위를 넘어서지 않았더라도 괴롭힘에 해당한다.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려면 업무 관련성이 인정돼야 한다. 괴롭힘이 사적 관계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직장 내에서 업무와 관련해 일어나야 '직장 내' 괴롭힘이다.

김현근 노무사는 "공격적 언행이 업무에 한정됐다면 오히려 업무 관련성을 인정받기 쉽다"고 했다. 심준형 노무사는 "업무와 관련된 질책도 노동자 과실에 준해 행하여야 한다"며 "업무 수행에 미비한 점이 있어도 잘못한 수준을 초과하여 지적당하는 걸 용인해야 하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명시적인 욕설과 폭력이 없었던 점도 문제되지 않는다. 직장 내 괴롭힘은 단순한 발언이 아닌,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2021년 대전지법은 인턴에게 "미친X이냐" "미쳤냐 진짜" 등 욕설을 한 C씨의 행위가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는 등 괴롭힌 것이라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밖에 다른 직원들에게도 "니들 대학 나왔잖아. 근데 이것도 못하냐"고 했는데, 재판부는 "일회적 발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감안해 괴롭힘이 아니라고 봤다.

반면 같은 해 수원지법 안산지원은 주식회사 D에 대해 직장 내 괴롭힘에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원 E씨에게 1,2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E씨는 2017년 회사에 입사한 이후 2년간 회사 임원의 거친 언행에 고통받았다.

당시 E씨는 직속 상사에게 "(임원이) 말끝마다 그만두라잖아" "말투도 싸우자고 덤빈다"며 고통을 호소했지만 회사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E씨는 결국 퇴사한 후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재판부는 "언행의 내용, 지속 기간, 피해자의 반응을 종합적으로 살펴"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볼 수 있다고 판결했다.

무엇보다 이런 모욕을 '사소하다'고 치부하면 언제든 더 심한 괴롭힘으로 악화될 여지가 크다. 김현근 노무사는 "업무 모욕은 처음엔 사소해 보여도 방치하면 갈수록 심각해지는 특성이 있다"며 "신고 후 가해자에 대해 강한 제재 조치가 내려지지 않더라도 문제를 조직 내에 인식시켜 변화를 촉구하고, 피해자는 배치 전환(분리 조치)·휴가 등 보호 조치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했다.

김현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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