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좌에 보이스피싱 피해금 넣고 지급정지
"돈 줘야 지급정지 풀어주겠다" 협박
피해금과 무관한 자금 입출금 가능토록
지방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A씨는 지난해 말 주거래 은행 계좌가 보이스피싱에 연루돼 지급정지 처분을 받으면서 곤경에 빠졌다. 거래처에 대금 지급이 막혀 빚 독촉에 시달리고, 인출도 못해 생활비를 빌려야 했다.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A씨는 앞서 온라인 카페를 통해 중고 물건을 10만 원에 판매했다. 문제는 물건을 구매한 사람이 보이스피싱 범인이었고, 대금을 A씨 계좌에 입금한 사람은 보이스피싱 피해자였던 것. 피싱에 당했다는 사실을 안 피해자가 A씨 계좌에 대한 지급정지를 요청하면서 A씨의 악몽이 시작된 것이다. A씨가 구매자에게 문제를 제기하자 그는 "300만 원을 입금하면 해결하겠다"고 되레 돈을 요구했다.
A씨는 은행과 경찰에 사정을 밝히고 호소해봤지만 허사였다. 현행법상 본인이 보이스피싱을 하지 않았다고 소명할 방법이 없고, 지급정지가 해제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해제까지 3개월이나 걸린다는데, 단돈 10만 원 때문에 파산하게 생겼다"고 토로했다.
계좌를 정지시킨 뒤 돈을 요구하는 이른바 '통장협박' 등 신종 보이스피싱 수법 피해가 증가하자 금융당국이 대책 마련에 나섰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28일 '제2차 금융분야 보이스피싱 대책'을 발표하고 피해 구제 방안을 설명했다.
대책에 따르면 우선 '통장협박'을 당한 피해자는 보이스피싱 피해금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에 대해 입출금이나 전자금융거래를 할 수 있게 된다. 전면 거래 중단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피하게 되는 셈이다. 이를 위해 금융위는 통신사기피해환급법(보이스피싱법) 개정안을 마련해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통장협박 피해자인 것이 명확한데도 현행법상 지급정지를 풀 수 없어 피해를 키우고 있다"며 "법 개정이 이뤄지면 금융회사도 적극적으로 구제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보이스피싱으로 신고된 사건 가운데 10~20%를 통장협박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상자산을 이용한 돈세탁도 막아 피해 구제를 강화하기로 했다. 현재는 범인이 보이스피싱으로 챙긴 피해금을 통해 가상자산거래소에서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을 구매하면, 해당 계정을 지급정지할 방법이 없다. 피해자가 가상자산을 구매해 범인의 전자지갑으로 직접 보내거나, 범인이 가상자산을 다른 가상자산거래소로 보낸 경우에도 지급정지가 불가능하다. 피싱 피해금을 되찾을 방법이 없다는 얘기다.
이에 금융당국은 가상자산거래소에도 보이스피싱법을 적용, 범인의 가상자산 계정을 정지하고 피해자 구제 절차를 밟을 수 있도록 추진한다. 내년부터는 해외거래소나 개인의 전자지갑으로 가상자산을 전송할 때 본인 확인을 강화하고, 일정 시간 동안 가상자산 전송을 제한하는 숙려기간도 도입하기로 했다.
카카오톡 송금이나 토스 간편송금 등을 악용한 보이스피싱도 증가하면서 이와 관련한 피해 구제 방안도 마련된다. 현재는 범인의 계좌 파악에만 2, 3일이 소요되고, 공범까지 있다면 그 기간은 더욱 길어져 피해 구제가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다. 이에 금융당국은 금융사와 선불업자 간 계좌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보이스피싱법을 개정해 신속한 환급이 가능하도록 추진한다.
금융위 관계자는 "향후 법 개정이 필요한 부분은 의원 입법을 추진해 국회에 제출하고, 금융사 등의 시스템도 신속히 개발해 진화하는 보이스피싱 수법에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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