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일부 ‘현중 사건 전원합의체로’ 의견 표명”
대법원 노란봉투법 버금가는 판례 변경할 수도
“입법부 등 눈치보다 대법관 구성 바뀌기 전에…”
원청 사용자에게 하청과의 단체교섭 의무를 부과하는 내용이 담긴 ‘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안)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환노위)를 통과한 가운데 대법원에 계류 중인 관련 사건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노란봉투법이 여권의 반대로 무산되더라도 대법원이 판례를 변경할 경우 노동 현장에서는 노란봉투법과 비슷한 효과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은 지난 21일 국회 환노위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이 집단퇴장한 상황에서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도 실행될 가능성은 낮다.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대법원에 계류 중인 한 사건이 노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금속노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가 원청을 상대로 단체교섭을 청구한 사건으로 1, 2심에선 기각됐다. 노란봉투법의 주요 내용 중 하나인 원청 사용자에 대한 하청 노동조합과의 단체교섭 의무 부과가 쟁점인 사건이다.
그런데 대법원에 4년여 계류 중인 이 사건이 전원합의체로 갈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법조계와 노동계에 따르면 대법원1부(주심 오경미 대법관)가 심리 중인 이 사건은 재판부(박정화·노태악·오경미·김선수 대법관) 가운데 일부가 “전원합의체로 가야 할 사건”이란 의견을 표명했다.
전합 가면 판례 변경 가능성 커... 대법관 과반수는 진보 성향
통상 대법원 1~3부에서 다루던 사건이 전원합의체로 갈 경우 판례 변경 가능성이 커진다. 이 사건의 판례 변경이 이뤄지면 입법 없이도, 원청은 하청과 함께 단체교섭의 당사자로 노사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된다.
현재 대법원장·대법관의 인적 구성으로 봐도 이 사건이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되면 이 같은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커 보인다. 대법원장과 대법관 14명 가운데 오석준 대법관을 제외한 13명은 문재인 정부가 임명했으며, 과반수가 진보 성향으로 분류된다.
기존 대법원 판례는 부당노동행위의 주체로서 원청의 사용자성은 인정하지만, 단체교섭 당사자로서 사용자성은 인정하지 않는다. 대법원은 1999년 부당노동행위주체로서의 사용자와 단체교섭 당사자로서의 사용자는 다르다고 판단했다. 이후 대법원은 2010년 원청이 하청의 노조 활동을 위축시키거나 침해하는 지배·개입 행위를 하는 정도면 부당노동행위의 주체인 사용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단체교섭 당사자로서 원청의 사용자성까지는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원청, 하청노조와 교섭하라" 판결·판정… 대법원 판례 변경 시 영향
그럼에도 지난달 12일 서울행정법원은 CJ대한통운이 지난해 6월 "사측은 전국택배노조의 단체교섭 요구에 응하라"는 취지의 판정을 한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를 상대로 낸 부당노동행위구제 재심판정 취소 청구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원청 사용자는 택배기사들의 근로조건에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고 단체교섭 당사자로서 원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했다. 기존 대법원 판례와 달리 원청이 하청 근로자의 근로조건에 강하게 개입할 경우 원청의 의무 범위를 부당노동행위의 주체에 한정하지 않고 단체교섭의 당사자로까지 넓힌 것으로 풀이된다.
최근 중노위에서도 산업안전보건 분야에 한정하긴 했지만, 단체교섭 당사자로서 원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하는 판정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 12월 30일 금속노조 대우조선해양 하청노조가 단체교섭에 응하라며 회사를 상대로 낸 부당노동행위 구제 재심신청 △지난해 3월 24일 금속노조 현대제철 하청노조가 단체교섭에 응하지 않는 회사를 상대로 낸 부당노동행위 구제 재심 신청 등이다. 두 사건에서 중노위는 “산업안전보건 등 원청의 실질적인 지배력이 큰 하청 근로자의 근로조건 일부에 한해 원청은 하청 사업주와 함께 단체교섭에 응하라”는 취지로 판정했다.
이들 판결·판정의 골자는 모두 원청 사용자가 하청 근로자의 단체교섭에 응하라는 것으로 대법원에 계류 중인 현대중공업 사건의 소송 청구 요지와 같다. 때문에 현대중공업 사건으로 대법원 판례가 변경되면, 이들 사건의 향후 상급심 결과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 경우 ‘노란봉투법’ 입법에 버금가는 노동권 향상을 노동계는 기대하고 있다.
조세화 민주노총 법률원 변호사는 “노조법상 부당노동행위와 단체교섭 당사자로서 사용자의 지위는 동일하다는 게 CJ대한통운 사건 서울행정법원의 판단”이라며 “노조법에도 사용자 개념을 근로계약 관계가 있는 경우만으로 한정하는 문구가 없기 때문에 부당노동행위의 주체, 단체교섭의 당사자로서 사용자의 지위가 동일하다는 것을 (대법원이) 확인하는 것은 헌법상 노동 3권을 보장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4년여 시간만 끌다 사정변경 없었는데도, "대법관 구성 바뀌기 전에…"
하지만 대법원에 현대중공업 사건이 계류된 것이 2018년 12월로 4년여가 지났고, 사건과 관련한 특별한 사정 변경이 없었다. 그간 대법원이 ‘심리불속행’(본안 심리 없이 상고 기각) 기간이 지나도록 시간을 끌다가 뒤늦게 전원합의체 회부를 검토하는 것을 두고 법과 원칙을 따라야 할 대법원이 사실상 정치행위를 하는 게 아니냐는 뒷말도 나온다. 국회에서 '노란봉투법' 법안이 통과되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예상되는 상황이 되자 판례 변경을 서두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대법관의 인적 구성도 이 같은 해석에 무게를 싣는 요인이다. 오석준, 오경미 대법관을 제외하고 대법원장과 대법관 등 12명은 올해부터 순차적으로 임기가 끝나 윤석열 정부가 새로 임명한다. 이 때문에 노동계는 대법관 과반이 보수 성향으로 바뀌기 전에 노란봉투법의 효과에 버금가는 판례 변경이 이뤄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앞서 CJ대한통운 사건 판결을 한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 정용석 부장판사는 2021년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이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낸 징계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을 하기도 했다. 중노위원 과반수와 중노위원장도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한 인사들로 진보성향으로 분류된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노조법상 원청은 근로계약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근로조건을 협의하는 단체교섭 당사자가 아니다. 원칙적으로 근로계약 당사자가 아닌 원청에게 근로조건을 책임지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하청 근로자의 보호 필요성은 인정되지만, 어려움이 있으면 어려움대로 (입법을 통해) 해결해야지, 판결의 체계성과 일관성을 해쳐가면서 너희들(원청과 하청 노조)끼리 해결하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런데도 대법원이 판례를 변경할 생각으로 이 사건을 전원합의체로 갖고 간다면 대법원 구성이 바뀌기 전에 무리수를 두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것”이라며 “입법독주 비판을 받고 있는 국회가 그렇듯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법원장과 대법관 구성이 바뀔 때마다 판례를 뒤집을 것이냐”고 지적했다.
노동계는 대법원이 현대중공업 사건에서 전향적 판례를 내놓을 것으로 기대하지만, 지난 4년여 동안 심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데 대해선 불만도 토로하고 있다. 대법원이 법과 원칙 대신 외부 눈치를 보며 정치적 고려를 지나치게 많이 해왔다는 주장이다. 민주노총 법률원장인 정기호 변호사는 “대법원이 단체교섭의 당사자로서 원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하게 되면 하청 노동자의 기본권인 노동3권이 향상될 것”이라면서도 “대법원이 지난 4년여 동안 이렇다 할 심리를 하지 않은 것은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