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는 기술보다는 이벤트의 성공
척척박사형 AI 챗봇은 이미 예견돼
한국은 수익성·위험성 탓 챗봇 기피
실패 뒷감당 어려운 국내 여건 탓도
"기술력 차이는 물론 있지만, 그렇다고 챗GPT가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 수준은 아니에요. 국내 기업들도 마음만 먹었다면 비슷한 챗봇을 먼저 개발할 수 있었을걸요?"
(대기업 인공지능 개발팀 관계자)
사람보다 글 잘 쓰는 로봇, 챗GPT(개발사 오픈AI) 열풍이 뜨겁다. 인문·사회·자연과학 뭘 물어도 알기 쉽게 풀어주는 척척박사이자, 몰입성 강한 장르 소설을 뚝딱 써내는 재주꾼이다. 미국에선 의사 면허를 따거나, 경영대학원(MBA)·로스쿨 시험에도 합격했다. 그래서 혹자는 챗GPT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AI) 등장을 △구텐베르크 인쇄술 △자동차 △컴퓨터의 발명에까지 견준다. 네티즌들은 챗GPT의 엉뚱한 대답을 인터넷 밈(meme·유행 콘텐츠)으로 소비하기도 한다.
그러나 환호하거나 충격에 빠진 세간의 반향과 달리, 챗GPT를 보는 AI 업계와 전문가들의 평가는 다소 싱겁다. "올 것이 왔다"거나 "기술적으로 그리 앞선 정도는 아니다"고 한다. 생성형 AI에 대한 대중과 전문가들의 시선은 왜 이렇게 다르게 나타날까?
척척박사 챗봇 새로운 기술 아니다?
AI 업계가 챗GPT에 크게 놀라지 않은 이유는 이렇다. 척척박사 스타일의 챗봇 등장은 초거대AI 등장과 함께 이미 예견돼 있었기 때문이다. 한 AI개발 업체 관계자는 "(챗GPT 이전 언어모델인) GPT-3는 매우 혁신적이었고, 업계에 충격을 줬지만, 챗GPT는 이를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 것에 불과하다"며 "기술적 성공이라기보단 이벤트를 성공시킨 셈"이라고 설명했다.
초거대AI는 인공 신경망인 매개변수(파라미터)를 수천억 개까지 늘린 AI다. 바둑에만 특화된 알파고처럼, 기존 AI는 구체적 사업·목적·필요에 따라 설계되는 게 보통이었다. 이에 비해 초거대AI는 일단 구축만 해 두면 이를 통해 여러 AI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다. 기술기업 입장에선 매번 별도 AI를 개발하기보다 초거대AI 하나를 개발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판단이 서게 됐다.
국내기업도 이미 초거대AI 구축 완료
초거대AI는 이미 국내에도 많은 기업들이 개발·운영하고 있다. 한국에선 네이버가 오픈AI, 화웨이에 이어 2021년 5월 세계에서 세 번째로 초거대AI 하이퍼클로바(HyperCLOVA)를 공개했다. 돌봄이 필요한 독거노인에게 AI가 전화를 걸어 식사·수면·건강 관련 안부를 확인하는 클로바 케어콜, 녹취록 작성 등에 널리 활용되는 클로바 노트도 이 초거대AI를 이용한다. 이밖에 카카오는 GPT-3 모델의 한국어 특화 버전인 KoGPT를, LG는 엑사원을, SK텔레콤은 에이닷을 보유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빠른 속도로 초거대AI를 구축할 수 있던 것은 AI 산업 역량이 그만큼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AI 알고리즘 쪽 기술 혁신을 선도했다고 볼 순 없지만, 흐름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대응해 온 덕분이다. 특히 AI는 다른 과학기술 분야와 달리, 아무리 획기적인 알고리즘이라도 오픈소스를 기반으로 개발하고, 개발 뒤 전 세계 개발자와 공유하는 전통이 있다. AI 대중화를 이끈 알파고는 2017년 그 기반인 딥마인드랩을 외부에 무료 공개했다.
초거대AI 기술이 챗GPT가 안 된 이유
이렇게 AI업계 상황을 보면 ①초거대AI 핵심 기술은 대부분 공개돼 있고 ②많은 기업들이 이미 초거대AI 구축을 완료한 단계다. 그렇다면 국내에선 왜 아무도 오픈AI보다 먼저 챗봇 개발에 나서지 못한 것일까?
우선 AI챗봇 시장의 수익성이 명확하지 않았다. 비싼 초거대AI를 이용해 '겨우 챗봇' 정도를 굴리는 것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활용이 모호한 챗봇보다는 초거대AI를 기반으로 명확한 타깃의 서비스를 개발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본 셈이다. 전 세계에 무료 버전을 공개한 챗GPT는 운영비만 하루 최소 10만 달러(약 1억3,000만 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대중에 공개하는 챗봇은 여론에 쉽게 휘둘려 실패했을 때 리스크가 큰 분야라는 점도 이유가 됐다. 연구개발 분야에서 한국은 '실패하면 끝난다'는 가치관이 강하다. 하지만 챗봇에 실수는 필연적. 세상 모든 것에 답하다 보면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오류 보정은 완성도를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다. AI는 제대로 된 답을 내지 못했을 때 이를 바로잡는 강화학습을 통해 정교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은 2020년 12월 국내에 출시됐던 챗봇 서비스 '이루다 1.0'이 각종 논란 끝에 3주 만에 종료되는 등 AI챗봇에 기술을 넘어선 '엄격한 윤리성'을 요구한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초거대AI를 개발하고도 굳이 챗봇을 만들지 않은 것은, 챗봇에서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 때문"이라며 "챗봇이 사실과 다른 답을 한다거나 윤리에 위배된 답을 내놓는다면, 기업까지 휘청거릴 수 있다"고 말했다. AI 주도권을 잃지 않았던 구글이 챗GPT 개발사 오픈AI에 주도권을 빼앗긴 것도 비슷한 이유라는 평가가 많다. 1위가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큰 손실을 감내해야 한다.
반면 오픈AI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투자를 받았을 뿐 연구소의 형태이고 상장된 기업도 아니다. 돈은 많지만 실패 리스크에서 자유로운 오픈AI의 독특한 형식이 '챗GPT'라는 시도를 가장 먼저 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실리콘밸리 특유의 도전적 투자도 한몫했다. 장병탁 서울대 AI연구원장은 "오픈AI는 이미 거대 기업의 CEO인 일론 머스크와 잘나가는 투자회사 운영가 샘 올트먼이 AI 분야에서 창업한 회사"라며 "일단 기술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자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한국에서도 이런 구조가 있어야 제2의 챗GPT 같은 혁신이 일어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챗GPT가 총대... "차라리 잘됐다"
국내 AI업계에선 선두를 빼앗긴 것은 아쉬운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결과적으로 챗GPT가 총대를 메며 생성형 AI의 진가를 입증한 상황을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다. 챗GPT의 좌충우돌을 본 사람들은 'AI도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고 그 실용성에 주목하게 됐다. 이미 업그레이드를 준비 중인 챗GPT를 따라잡는 것은 어려울지 모르지만, 특정 분야 AI 서비스는 챗GPT를 충분히 능가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AI 시대 기반이 되는 '컴퓨팅 파워' 구축에 앞으로 정부의 관심이 이어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초거대AI는 물론 AI 관련 서비스를 개발하거나 운영하려면 병렬연산에 능숙한 그래픽처리장치(GPU)가 많이 필요하다. 하지만 국내 GPU 인프라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문형돈 정보통신기획평가원(IITP) 기술혁신본부장은 "트랜스포머 개발 이후 AI 알고리즘의 기술적 수준은 거의 비슷해졌고 그 차이도 줄어드는 중"이라며 "결국 경쟁력은 그 기술을 뒷받침하는 컴퓨팅 파워에서 판가름 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AI 개발 및 운용에 최적화된 AI 반도체를 개발하고 이를 데이터센터에 적용하는 것이 핵심"이라며 "거대 빅테크의 데이터센터와의 격차는 크지만 한국만의 효율화된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면 세계 시장에도 도전할 여지가 생긴다"고 덧붙였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