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공원 도로 하천 개발만 지원해
기업 대학 문화시설 유치 쉽지 않아
대부분 공여지 문 닫힌 채 장기 방치
국비 지원 제한돼 지자체 추진 한계
주민들 "미군 떠났는데 더 낙후" 부글
회색 담벼락으로 둘러쳐진 주한 미군기지(공여지)가 국민 품으로 돌아온 지 20년째를 맞았다. 미군기지 반환은 군소기지를 통폐합하는 내용의 ‘연합토지관리계획(LPP)’에 기반해 2003년부터 본격화됐다. 현재 전국의 반환 대상 미군기지 80곳 중 69곳이 한국 정부로 넘어왔고, 나머지 11곳은 미반환 상태로 남아 있다.
2006년에는 미군 주둔으로 낙후된 지역의 공여지 개발을 지원하는 ‘주한미군 공여구역 주변지역 등 지원 특별법’이 시행됐다. 지역 주민들은 “미군 기지촌이라는 불명예를 벗고 침체된 지역경제가 되살아날 것”이라고 기대를 품었지만, 지난 20년간 개발이 완료된 곳은 2곳에 불과하다. 특별법까지 만들어 국비 지원이 이뤄진 결과치고는 초라한 성적표다. 당연히 주민들 사이에선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기약 없는 기지 개발에 등 돌린 주민들
21일 경기 동두천시 소요산 방향 3번 국도변 미군기지 앞. 북캐슬(캠프캐슬)이라고 쓰인 표지판 뒤로 철조망이 쳐진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전체 8만3,000㎡ 가운데 서측 5만㎡는 여전히 미군이 창고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반환 시기가 불투명해 개발 사업은 기약이 없다. 상가 하나 없는 기지 주변은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어 황량했다. 나머지 3만3,000㎡는 반환된 지 7년 6개월이 지난 작년 말에야 겨우 환경정화작업이 끝나 시가 매입을 완료했다.
동두천시 관계자는 “서측 5만㎡는 언제 반환될 지 모르고, 나머지 3만3,000㎡는 공원으로 조성하려고 하는데, 국비 지원이 안 돼 자체 예산 20억 원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많다”고 토로했다. 북캐슬 주변에서 자영업을 하는 김모(65)씨는 “기지도 다 넘겨받지 못했는데 무슨 개발이 되겠느냐”며 “생전에 개발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또 다른 주민은 “미군들이 다 떠났는데 개발사업은 더디기만 해 상인들은 더 힘들어졌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같은 날 의정부시 장암동 캠프잭슨(164만2,000㎡) 인근에서 만난 주민들도 공여지 개발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 눈치였다. 잭슨 부지는 2020년 12월 반환돼 정화작업이 끝나는 2025년 8월 이후에나 개발이 가능하다. 기지 주변은 서울과 맞닿아 의정부 최대 노른자 땅으로 꼽히지만, 공사 차량이 쉴새 없이 드나들고 낡은 가옥이 즐비해 어수선하고 낙후된 모습이었다. 주민 최모(80)씨는 “개발 얘기는 10년 전부터 나왔지만 진척이 없다. 코를 찌르는 악취부터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못마땅해했다.
공여지 개발 지지부진, 주민들 부글
전국의 미군 공여지 개발 사업이 주민 기대만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반환 절차가 복잡하고 환경정화 작업도 평균 3년가량 걸려 실제 개발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군공여지특별법은 반환 공여지를 공원·도로·하천으로 개발할 때만 토지매입비의 일부(최대 80%)를 정부가 지원하도록 돼있어, 재정이 열악한 지자체가 기업이나 대학, 문화시설을 유치하려면 현실적인 벽이 높다. 공사비와 조성비도 100% 지자체 몫이다. 이런 이유로 지자체는 주민이 원해도 사업비 부담 때문에 문화·예술·체육 인프라 구축 사업은 엄두도 못내고 있다.
27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반환된 미군기지 69곳(면적 1억4,200만여㎡) 중 실제 개발이 완료된 곳은 부산 갬프 하야리아(시민공원·도로), 의정부 시어즈캠프(광역행정타운) 2곳뿐이다. 부분 개발이 완료된 에세이욘캠프(의정부 을지대병원), 캠프캐슬(동양대 북서울캠퍼스), 쿠니캠프(화성 평화생태공원) 등을 포함해도 7곳에 불과하다. 지역 내 자족 시설을 확충했다는 점에서 성공 사례로 꼽히지만, 전체적인 사업 성과가 미미해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나머지 62곳은 대부분 빈터로 방치된 채 닫혀 있거나 한국 군부대 부지로 쓰이고 있다. 파주시의 경우 민자사업 유치에 잇달아 실패하면서, 2007년 반환이 완료된 5개 미군기지(1,061만여㎡) 모두를 15년째 빈터로 놔두고 있다. 다른 지역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강원 춘천시 근화동 캠프페이지(43만5,000㎡)의 경우 춘천시가 2017년 1,151억 원을 들여 소유권을 넘겨받았지만, 구체적인 활용 계획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2013년 반환된 원주 캠프롱도 땅값 계산방식을 놓고 원주시와 국방부 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으면서 개발이 늦어지고 있다.
지자체 “공여지 지원법 지원범위 확대해야”
지자체들은 현행법과 지자체의 열악한 재정 여건으로는 공여지 개발이 쉽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기지촌’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주민 편의 시설을 조성하려고 해도, 숱한 난관에 부딪혀 포기하는 지자체가 적지 않다.
동두천시는 핵심 공여지 반환이 10년 넘게 미뤄져 대기업 유치 등 개발사업을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시는 지난 70년 동안 시 전체 면적(95.66㎢)의 42%(40.63㎢)를 미군 기지로 내줘 연평균 3,000억 원(경기개발연구원 조사) 정도의 경제적 손실을 입고 있다. 시 관계자는 “개발 여건이 뛰어난 캠프 케이시 등의 조속한 반환만이 ‘공여지 지원 특별법’ 취지를 살리는 길”이라고 토로했다.
정부 재정지원 체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공여구역 지원특별법에 토지매입비 재정 지원대상이 도로·공원·하천에만 한정돼 있어 대학이나 민자개발사업 유치가 쉽지 않다. 파주시는 2007년부터 국민대와 이화여대, 서강대 등 대학 캠퍼스 유치에 나서 협약까지 맺었으나 대학들이 막대한 토지 매입비 마련에 난색을 표하면서 줄줄이 실패했다. 의정부시도 2009년 건국대 유치에 뛰어들었으나, 비슷한 이유로 성공하지 못했다. 일자리 창출 효과가 있는 기업 유치나 산업단지 조성사업 사례가 단 한 건도 없는 것도 이런 난제들 때문이다.
경기도 지자체들은 수년 전부터 “공여지에 대한 민자사업과 문화예술체육 시설에 대해서도 국가 지원을 확대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정부로부터 진전된 답은 듣지 못했다.
민자사업은 수치로 확인될 정도로 실적이 저조하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26년까지 ‘주한미군 공여구역 주변 지역 등 발전종합계획’을 추진하면서 총 47조6,276억 원이 들어갔거나 추가 투입할 예정이다. 이 중 민자사업비가 37조3,329억 원이지만 지난해 말 기준 집행률은 18%에 그치고 있다. 국비(82%)와 지방비(70%) 집행 실적과 비교하면 4분의 1 수준이다. 행안부가 미군공여지지원특별법 시행에 따라 수립하는 발전종합계획에는 반환된 69곳 중 26곳이 담겨 있다. 지형 상 개발이 가능하고, 지자체 매입 대상에 포함된 기지들이다.
김민철(경기 의정부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용산미군기지는 ‘용산공원 조성 특별법’에 따라 정부가 11조 원을 투입해 직접 개발하는 데 반해, 전국에 산재된 미군기지는 제한된 항목에 대한 토지비 일부만 지원하고 있어 형평에 맞지 않는다”며 “미군공여지특별법도 지원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행안부 관계자는 “재정이 열악한 지자체에서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미군기지 개발을 주도하기 힘든 만큼, 재정부처에 지원 확대를 건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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