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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감형이 '거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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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감형이 '거래'되고 있다

입력
2023.02.14 19:00
수정
2023.02.15 13:08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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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으로 간 성폭력'
김보화 저자 인터뷰

오늘날 성범죄 가해자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법적 혜택을 받는다. 성범죄 전담법인의 등장 때문이다. 피해자는 자신의 감정을 관리하며 가해자와 자원 경쟁을 해야 하는 현실에 놓였다. 게티 이미지 뱅크

오늘날 성범죄 가해자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법적 혜택을 받는다. 성범죄 전담법인의 등장 때문이다. 피해자는 자신의 감정을 관리하며 가해자와 자원 경쟁을 해야 하는 현실에 놓였다. 게티 이미지 뱅크

“법무법인이 강도, 살인, 방화 가해자의 형량을 줄였다고 ‘성공 후기’를 쓰며 광고하지는 않죠. 그런데 성범죄 가해자의 형량을 줄이면 적극 홍보합니다. 우리 사회가 성범죄를 별거 아니라고, 사소하다고 보는 인식이 깔려 있죠.”

김보화(42) 젠더폭력연구소 소장은 성범죄를 돈벌이로 생각하는 일부 법무법인에 걱정이 많다. 수많은 성범죄 가해자들이 이들의 조언을 받아 재판에서 형량을 줄이고, 피해자를 명예훼손으로 역(逆)고소해 고통에 빠뜨린다. 이런 한심한 일들이 버젓이 이뤄지는데 누구도 제지하지 않는 게 우리 사회 현주소다.

여성주의 연구자로 활동하며 ‘성폭력 가해자 전담법인' 문제를 세상에 알려 온 김 소장이 책 ‘시장으로 간 성폭력’(휴머니스트)을 펴냈다. 성폭력 가해자가 어떻게 ‘합리적 소비자’로 변신하는지, 성폭력 피해자가 왜 끊임없이 피해를 증명해야 하는지를 통렬히 고발했다. 전화로 만난 김 소장은 “성폭력 가해자의 방어권만 늘어가는 기형적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장으로 간 성폭력ㆍ김보화 지음(오른쪽 사진)ㆍ휴머니스트 발행ㆍ392쪽ㆍ2만1,000원

시장으로 간 성폭력ㆍ김보화 지음(오른쪽 사진)ㆍ휴머니스트 발행ㆍ392쪽ㆍ2만1,000원

성범죄 전담법인이 최근 고속 성장한 배경은 복합적이다. 미국식 로스쿨 제도가 도입되면서 변호사 간 경쟁이 치열해졌고, 성범죄 시장이 틈새시장으로 부각됐다. 아동 성범죄가 잇따르며 ‘성범죄 엄벌주의 여론'이 대두된 것도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가해자들은 사회적 사형선고인 성범죄자라는 꼬리표를 달지 않기 위해 법무법인을 이용해 필사적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이들 '무고한 가해자'를 지키기 위한 성범죄 전담법인의 전략은 지능적이다. 가해자에게 ‘무죄를 다툴 여지’가 있을 경우 피해자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뒤지고 전 남자친구를 찾아 ‘피해자는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다’는 논리를 편다. 가해자에게 피해자나 피해자 주변인을 명예훼손으로 역고소하도록 권하기도 한다. 피해자를 괴롭혀 재판 의지를 꺾기 위해서다.

가해자가 유죄 가능성이 크다면 감형 전략을 편다. 집요하게 피해자와 합의를 시도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진술을 얻어낸다. 합의에 실패하면 여성 단체에 기부금을 내는데 재판부에 ‘진지한 반성’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군대 우수 사격상, 장기기증 서약서, 주변인 선처 요구 등을 긁어모아 제출하는 것도 필수다. 가해자가 평소에 멀쩡한 사람인데 ‘한번의 실수’를 했으니 선처를 구한다는 식이다.

성매매 알선 등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아 복역한 그룹 빅뱅 전 멤버 승리(본명 이승현)가 지난 9일 만기 출소했다. 성매매, 성폭력 등 9개 혐의가 인정됐지만, '혐의를 인정하고 반성한다'는 이유에서 징역 3년이 1년 6개월로 감형됐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성매매 알선 등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아 복역한 그룹 빅뱅 전 멤버 승리(본명 이승현)가 지난 9일 만기 출소했다. 성매매, 성폭력 등 9개 혐의가 인정됐지만, '혐의를 인정하고 반성한다'는 이유에서 징역 3년이 1년 6개월로 감형됐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놀랍게도 우리 재판부엔 이런 전략이 통한다. 재판부는 가해자가 헌혈증을 100장 냈다고, 여성단체에 기부금을 냈다고, 외모 콤플렉스로 힘들어 했다고 감형을 해준다. 심지어 피해자가 아닌 판사한테 반성문을 내도 정상 참작해 준다. 재판이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경쟁하는 투쟁의 장으로 변질된 것이다. 결국 성폭력 피해자는 수사ㆍ재판 과정에서 끊임없이 더 강력하게 ‘피해자다움의 증거’를 입증해야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김 소장은 "성범죄 가해자를 변호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다만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상업화된 법인을 통해 감형되고 성폭력을 사소한 범죄처럼 여겨지게 하는 구조는 개선돼야 한다”고 했다. 변호사들이 과장 광고를 못 하게 하는 변호사법을 엄격하게 적용하거나, 법무법인이 역고소를 기획하는 행위를 변호사협회 차원에서 규제해야 한다는 제언이다. “미투 운동 이후 사회 전반의 성범죄 감수성은 많이 향상됐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성범죄 피해자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성범죄 사건의 법 시장화에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정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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