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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모양을 보여주는 너도바람꽃

입력
2023.02.13 04:0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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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증맞도록 작고 꽃은 별처럼 생겨
인적 드문 곳에서야 겨우 피는 희귀식물

편집자주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이 격주 월요일 풀과 나무 이야기를 씁니다. 이 땅의 사라져 가는 식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허 연구원의 초록(草錄)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너도바람꽃. 하얀색 별처럼 생긴 꽃은 어른 엄지손톱 크기 정도로 아주 작다. 땅이 다 녹기도 전에 제 온기로 꽃을 피운다. 봄의 전령사로 통하는 복수초보다 먼저 핀다. 이하 허태임 작가 제공

너도바람꽃. 하얀색 별처럼 생긴 꽃은 어른 엄지손톱 크기 정도로 아주 작다. 땅이 다 녹기도 전에 제 온기로 꽃을 피운다. 봄의 전령사로 통하는 복수초보다 먼저 핀다. 이하 허태임 작가 제공

"너도 그래.”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리며 바람꽃이 말하면 너도바람꽃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끄덕할 것 같다. ‘너도’와 ‘나도’라는 주어로 시작하는 말은 위로와 공감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나와 너를 결속하여 하나로 묶어주는,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으니 외롭지 말라는, 거기가 어디든 발붙이고 살라는, 누군가를 지탱해주는 힘을 지닌 그런 말.

꽃집에서 파는 아네모네의 우리 이름은 바람꽃이다. 단 한 식물을 콕 집은 이름은 아니고 바람꽃 무리에 속하는 여러 재배품종을 아울러서 아네모네라고 부른다. 그들과 닮았지만 딱 그 혈통은 아니고 사촌지간쯤 된다고 ‘너도’와 ‘나도’라는 접두어를 단 너도바람꽃과 나도바람꽃이 있다. 조상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생김새가 닮은 바람꽃과 너도바람꽃과 나도바람꽃. 그중에 가장 일찍 피는 건 너도바람꽃이다. 절기상 우수와 춘분 사이 너도바람꽃은 핀다. 흔히 봄의 전령사로 통하는 복수초보다 실은 먼저 핀다.

미국에서는 너도바람꽃을 아예 ‘겨울에 피는 꽃’이라고도 부른다. 땅이 온전한 해빙을 허락하기도 전에 제 온기로 꽃을 피우는 너도바람꽃. 인간의 학명에서 앞 단어인 속(屬)의 이름이 ‘호모(Homo)’이듯이 식물도 저마다 그 이름이 있다. 너도바람꽃은 ‘에란티스(Eranthis)’다. ‘꽃’을 말하는 ‘anthis’ 앞에 ‘일찍’이라는 의미의 접두어 ‘Er’이 붙은 단어로, 이름 그 자체가 일찍 피는 꽃이라는 뜻이다.

너도바람꽃. 하얀색 별처럼 생긴 꽃은 어른 엄지손톱 크기 정도로 아주 작다. 땅이 다 녹기도 전에 제 온기로 꽃을 피운다. 봄의 전령사로 통하는 복수초보다 먼저 핀다.

너도바람꽃. 하얀색 별처럼 생긴 꽃은 어른 엄지손톱 크기 정도로 아주 작다. 땅이 다 녹기도 전에 제 온기로 꽃을 피운다. 봄의 전령사로 통하는 복수초보다 먼저 핀다.

너도바람꽃은 앙증맞도록 작다. 활짝 핀 꽃이 어른 엄지손톱만 하다. 꽃은 별처럼 생겼다. 인적 드문 곳에서야 겨우 피는 희귀식물이지만 환경이 허락하는 장소에서는 후두두 하늘에서 쏟아진 것처럼 군락을 이루며 핀다. 내가 일하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 사는 너도바람꽃은 아마도 이달 말쯤 되어야 개화를 시작할 듯하다. 작년에 그들이 피었던 자리를 찾아가 언제 얼굴을 보여줄 거냐고 묻는 게 요즘 나의 낙이라고나 할까.

너도바람꽃은 생존해서 번식하기 위해 갖은 수를 쓴다. 그 전략은 첫째, 봄이 오기 전에 활동하는 몇 안 되는 곤충의 눈에 단번에 들 방법을 고안했다. 작은 체구에 매화를 닮은 꽃이 피는데 하얀 꽃잎은 사실 꽃잎이 아니라 그 행세를 하는 꽃받침이다. 그럼 꽃잎은? 과감하게 생략했다. 꽃잎 만드는 데 쓸 에너지를 꽃받침에 ‘몰빵’한 거다. 그래서 최대한 밝은 하얀색으로, 되도록 크고 넓적하게 꽃받침을 만든다. 그건 꽃가루받이를 해줄 곤충이 쉽게 찾아와서 편히 앉아 쉴 수 있도록 의자를 만들어둔 거다. 치밀하게 계획된 놀라운 전술이다. 실제 꽃잎이 나야 할 자리에는 개나리색 젤리 같은 것이 오종종 박혀 있다. 너무 작아서 언뜻 보면 암술인지 수술인지 구별이 잘 안 되지만 역할만은 확실하다. 그건 바로 꿀을 품은 꿀샘이다. 봄이 오기도 전에 활동하는 몇 안 되는 곤충을 전략적으로 불러들일 목적으로 그 작은 생명체는 스스로 꿀을 빚는다.

변산바람꽃. 1993년 전북 부안군 변산면 세봉계곡에서 처음 발견된 우리나라 고유 식물이다. 너도바람꽃과 형제 식물로 2월 중순부터 피는 이른 봄꽃이다.

변산바람꽃. 1993년 전북 부안군 변산면 세봉계곡에서 처음 발견된 우리나라 고유 식물이다. 너도바람꽃과 형제 식물로 2월 중순부터 피는 이른 봄꽃이다.

너도바람꽃과 형제 식물인 변산바람꽃이 있다. 그 둘은 거의 비슷하게 생겼지만 가장 확실한 차이는 꿀샘의 모양이다. 너도바람꽃은 마치 샛노란 슬라임으로 빚은 작은 구슬을 닮았다면, 변산바람꽃은 연녹색 깔때기를 아주 작게 축소해놓은 모양이다. 전북 부안군 변산면 세봉계곡에서 1993년 처음 발견되어 보고된 변산바람꽃은 2월 중순부터 마이산,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 등지에서 너도바람꽃처럼 빨리 핀다.

너도바람꽃의 전략은 또 하나 있다. 꽃을 보호하기 위한 특수 기관을 추가로 만드는 일이다. 잎처럼 생겼지만 실제로는 잎이 아닌 ‘포엽(苞葉)’이 꽃받침처럼 꽃을 안전하게 지킨다. 잉태에 성공할 때까지 씨앗이 될 밑씨를 완벽하게 보호하는 것이다. 인간이 소중한 생명을 감싸거나 값진 선물을 포장할 때 보(褓)나 포대기를 쓰듯이 식물은 자신의 꽃을 보호하기 위해 잎을 특별한 방식으로 개조한다. 그것을 어려운 한자어 대신 ‘꽃싸개잎’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너도바람꽃 열매. 봄이 채 가기도 전에 서둘러 열매를 맺고 씨앗을 퍼뜨린 후 숲에서 자취를 감춘다.

너도바람꽃 열매. 봄이 채 가기도 전에 서둘러 열매를 맺고 씨앗을 퍼뜨린 후 숲에서 자취를 감춘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 자그마한 몸체를 지탱하는 힘의 원천은 뿌리에 있다. 블루베리처럼 생긴 덩이뿌리를 땅속에 숨겨둔 것이다. 너도바람꽃은 땅속에서 최대한 둥글게 웅크린 자세로 혹독한 겨울을 통과한다. 그러고는 숲에 경쟁자가 적을 때 그 뿌리에서 꽃대를 내고 일찍이 꽃을 피우고 서둘러 꿀을 빚는다. 어떤 날에는 눈을 맞으면서도 한다. 개화한 지 몇 주 내에 모든 전술을 동원하여 곤충을 불러들이고 수정에 성공하고 열매를 맺은 다음 숲이 초록을 채 입기도 전에 홀연히 모습을 감춘다. 그러면 바통을 이어받은 나도바람꽃과 바람꽃 무리(들바람꽃과 꿩의바람꽃과 홀아비바람꽃)가 한반도 여기저기 깊은 숲에서 피기 시작한다. 진짜 바람꽃은 설악산과 점봉산의 산정에서 여름에 핀다.

바람은 모양도 색깔도 없으니 볼 수가 없다. 우리가 만질 수도 없다. 봄이 오고 있다고, 이른 봄의 바람은 이런 모양이라고 말해주고 싶다는 듯이 골짜기마다 바람꽃들이 움트기 시작한다.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허태임의 초록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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