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으로 전국이 폐허가 됐던 시기에 서울대 조소과에 입학해 우성 김종영(1915~1982)에게 교육을 받았던 네 작가가 있다. 김종영미술관에서 이달 3일부터 다음 달 26일까지 열리는 ‘분화(分化)’ 전시는 추상 조각 선구자에게 교육을 받은 네 작가가 각기 어떻게 자신의 세계관을 만들어나갔는지 조망한다.
이번 전시에는 송영수(1930~1970) 최종태(91) 최의순(89) 최만린(1935~2020)의 조각 19점과 드로잉 38점을 전시한다. 이들은 1950년부터 1954년 사이에 서울대 조소과에 입학해 나란히 조각가의 길을 걷고 졸업 후에는 모두 모교에서 교수로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최의순은 이 시기를 “흙을 퍼와서 드럼통에 넣고 흙탕물에서 흙을 꺼내 말리던 시절”로 기억한다. 요즘처럼 흙을 사서 쓰는 ‘좋은 시절’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같은 스승에게 지도를 받았지만 이들은 저마다 다른 길을 걸었다. 넷 중에 가장 먼저 조각에 입문한 최만린은 서구 인체 조각의 영향에서 벗어나 한국적 감성에 뿌리를 둔 작업을 해 나갔다.
철조 조각의 선구자인 송영수는 일찍부터 새로운 재료와 기법을 수용했다. 혹자는 미국, 서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조각 전통이 단절됐던 한국에서 그 나름의 연구를 거듭한 끝에 나온 결과물이다. 그는 생전 한 인터뷰에서 '미술의 민족론'에 대해서 “외피적인 동양적인 성격을 상상한다던가, 표면적인 향토성을 음미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라며 동양적 정신 상황 자체를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반면 최의순은 온전히 석고만을 이용해서 조각을 만들기 시작했다. 석고가 마르기 전에 붙여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한 번에 작품을 완성하는 서예를 닮았다. 최의순은 해외 작품들을 보고 영향을 받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자신의 작품 세계가 있는데 왜 남의 것을 거기다가 넣겠느냐”라면서 “(뻐꾸기가 몰래 낳은 알을 품는) 자고새가 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최종태는 평생 인체만을 조각한 것으로 유명하다. 성모상과 관음상 등은 많은 관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평생 사람을 만들면서도 인간 자체를 그대로 본뜬 조각을 만들지 않았다. 인체 자체보다는 그 구조를 표현해 내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최종태는 이번 전시에 대해서 “우리는 일본 사람들로부터 배우지 않은 세대다. 해방되고 미술대학을 우리 손으로 만들고 거기에 입학해서 한 교실에서 공부한 1세대”라면서 “그런데 작품이 각각 다르다. 비슷하면 경쟁이 되는데 달라서 서로 싸우지 않았다. 이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라면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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