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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물간 작가와 일제 99식 소총이 들려주는 '시대의 아픔과 곡절'

입력
2023.02.10 04:3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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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빵야' 리뷰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연극 '빵야'에서 아픈 한국 근대사가 녹아 있는 아리사카 99식 소총이 의인화돼 등장한다. 엠비제트컴퍼니 제공

연극 '빵야'에서 아픈 한국 근대사가 녹아 있는 아리사카 99식 소총이 의인화돼 등장한다. 엠비제트컴퍼니 제공

1939년 대중화된 아리사카 38식 보병총에서 화력을 강화하고 적중률을 높여 내놓은 총이 아리사카 99식 소총이다. 당대 최고의 성능으로 300만 정이 생산된 이 총은 일제 제국주의 침략의 주력 화기였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사용됐고, 한국전쟁에서도 남한군과 북한군이 일제가 남긴 이 총으로 서로를 겨눴다. 극작가 김은성은 일제가 남기고 간 총으로 남과 북이 싸웠다는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연극 ‘빵야’를 썼다. 작품은 우리 근대사의 아픈 역사를 함께한 아리사카 99식 소총을 의인화해 등장시킨다.

연극 ‘빵야’는 한물간 드라마 작가 나나가 재기를 노리며 소총을 소재로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이 외형적 플롯으로, 그가 드라마로 쓰는 99식 소총 ‘빵야’를 소유한 이들의 이야기가 극중극으로 펼쳐진다. 1945년 인천 조병창에서 만들어진 장총은 첫 주인인 조선인 일본군 장교 기무라에게서 순진무구한 조선인 병사 길남에게, 일본군에게 가족을 잃은 명포수의 딸 선녀에게, 그리고 다시 4·3사건이 벌어지던 해 제주도 국방경비대였던 그저 배곯는 게 싫어 군대에 입대한 형제 많은 가족의 순진무구한 장남 무근에게 전해진다. 그렇게 빵야의 주인은 서북청년단 신출에게, 학도병 원교와 북한군 의용대 아미의 손을 거쳐 빨치산 토벌대 장총과 소녀 빨치산 설화에게로 이어진다.

연극 '빵야'에서 아픈 한국 근대사가 녹아 있는 아리사카 99식 소총이 의인화돼 등장한다. 엠비제트컴퍼니 제공

연극 '빵야'에서 아픈 한국 근대사가 녹아 있는 아리사카 99식 소총이 의인화돼 등장한다. 엠비제트컴퍼니 제공

근대 역사 속에서 빵야를 거쳐 간 인물들의 일대기는 근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어쩔 수 없이 군인이 됐거나 가해를 막기 위해 총을 들었던 길남이나 선녀, 무근과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 이후 인민군에 대한 복수심으로 악마가 된 신출이 총을 잡은 이유는 달랐지만 모두 역사의 희생자라는 점은 다르지 않다. 한때 백두대간에서 자연을 품었던 졸참나무는 음악을 품고 싶었지만 어쩌다 처절한 굉음을 내는 총이 되어 역사의 현장에서 이들과 함께하며 아픈 역사를 앓는다.

극 중 나나는 빵야를 소유했던 각 인물들의 일대기를 정성들여 서술한다. 인물이 많고 각 인물들의 전사(前事)의 양도 많다 보니 서사적 방식을 취한다. 나나와 빵야는 각 인물의 사연을 마치 드라마 대본을 읽듯 내면심리는 물론 행동 지문까지 전한다. 서사성과 연극성을 결합한 사건 진행으로 많은 인물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그럼에도 정보의 양이 워낙 많다 보니 관객이 이를 충실하게 따라가기가 버겁다.

연극 '빵야'에서 아픈 한국 근대사가 녹아 있는 아리사카 99식 소총이 의인화돼 등장한다. 엠비제트컴퍼니 제공

연극 '빵야'에서 아픈 한국 근대사가 녹아 있는 아리사카 99식 소총이 의인화돼 등장한다. 엠비제트컴퍼니 제공

작품의 틀인 한물간 드라마 작가 나나의 이야기는 현재 관점에서 또 다른 전쟁을 벌인다. 나나가 쓰는 99식 소총을 다룬 드라마는 담고 있는 의미적 가치는 충분하지만 시청자 트렌드에 맞지 않아 제작이 보류된다. 대형 역사물이어서 제작비도 많이 드는데 에피소드별로 주인공이 바뀌는 극에 스타 출연자를 섭외하기 어렵고 시장성이 약한 작품의 성격상 투자를 받기도 힘들다. ‘이러한 현실적 제약을 헤치고 빵야의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인가’가 작품을 이끄는 외적 플롯으로 작용한다. 나나가 빵야를 소유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한 편씩 써 내려가면서 빵야의 이야기는 점차 구체적인 모습을 띠어간다. 그럴수록 드라마로 제작하기 어려운 현실적 문제가 도드라지고, 동시에 이 작품을 완성해야 하는 의미 역시 분명해지면서 현실과 당위 간의 갈등을 빚는다.

연극 ‘빵야’의 틀인 나나의 이야기와 극중극 형태로 펼쳐지는 빵야의 이야기는 대등한 무게로 전개된다. 역사적 무게감은 빵야 쪽으로 치우치지만, 나나의 이야기는 동시대적 감각을 유지하며 묵직한 서사의 무게감을 덜어줘 쉴 여지를 준다. 긴장과 이완, 서사의 문학성과 무대의 연극성을 교차시키며 영리하게 풀어가는 연출로 3시간(인터미션 포함)에 가까운 이야기를 지루함 없이 듣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수시로 인물과 시점이 변하고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복잡한 서사를 훌륭히 소화해낸 배우들의 연기력이 작품의 재미를 100% 끌어낸다.

빵야 역에는 하성광, 문태유 나나 역은 이진희, 정운선이 더블 캐스팅됐고 오대석, 이상은, 김세환, 김지혜, 송영미, 진초록, 최정우 등이 멀티플레이어로 다역을 맡는다. 26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U+스테이지에서 공연한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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