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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떨어져도 엄마 탓" 나를 피하는 딸과 남편에 절망감

입력
2023.02.13 04:30
수정
2023.02.22 12:29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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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저와 말도 안 하려는 남편과 딸 때문에 너무 괴롭습니다. 남편은 결혼생활 동안 교감이 없었고, 딸은 사춘기 즈음부터 관계가 악화됐습니다. 딸에게 다가가고 싶지만 딸은 오히려 저의 잔소리 때문에 성적이 떨어졌다며 외면합니다. 최근에는 지각 문제로 자주 부딪히면서 사이가 더 나빠졌어요.

원래부터 아이와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아니었어요. 딸은 밝고 똑부러진 아이입니다. 저에게 사랑한다는 표현도 잘하고, 어렸을 때부터 다방면에 재능을 보였죠. 그러다 수년 전부터 성적이 떨어지면서 사이가 멀어졌어요. 본인이 원해서 받은 심리 검사에서 불안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목표한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자 많이 좌절하는 게 보입니다. 성적 문제로 이야기할 때면 엄마 잔소리가 듣기 싫다고 하고, 지각 같은 문제 행동을 지적하면 상관하지 말라는 식입니다.

제가 아이의 문제에 간섭하는 편이라면 남편은 아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두는 스타일이에요. 자녀 교육과 양육에 있어 늘 혼자 전전긍긍하고 있어요. 평생 '나는 싱글맘이다'라는 생각으로 살아왔죠. 아이가 비뚤어질까 봐 걱정하는 마음에 제가 잔소리라도 하는 날엔 오히려 남편이 저를 향해 큰 소리를 칩니다. 얼마 전 딸아이의 지각 문제로 제가 아이에게 한 소리를 하자 남편은 아이 앞에서 저에게 "XX년이 지랄해서 미치겠다"고 욕설을 했어요. 그냥 두면 저절로 고쳐질 일인데 제가 과잉반응을 하며 문제를 키우고 있다는 거죠.

이 모든 일의 원인은 서로 감정 교류가 전혀 없는 부부 관계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살면서 남편과 공유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겉으론 평화로워 보일지 몰라도 남편만 보면 화가 치밀어요. 남들에겐 유능한 사람이지만 저에게는 너무나 무능한 사람이에요. 학교 폭력 후유증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던 아들을 키우면서 겪었던 일들에 개입한 적이 거의 없고,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즐거움을 찾는 일에도 관심이 없어요. 그렇다고 제가 하는 일에 딱히 반대도 하지 않습니다. 자녀 문제를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불안했어요. 최근에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겪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불안과 두려움이 한층 더 커진 것 같습니다. 딸아이라도 문제없이 잘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잔소리가 더 늘었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어요.

매사 자신감 넘치고 당당했던 저는 어디 갔을까요. 전 세 자매 중 둘째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고, 누구보다 사람들 앞에 잘 나서고 우수한 성적으로 좋은 학교에 진학해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했던 딸이었어요. 아빠가 제가 초등학생 때까지 때린 것에 대해 상처를 받기도 했었고, 엄마가 원하는 진로를 선택한 언니와 몸이 선천적으로 약해 항상 보호의 대상이었던 동생으로 인해 엄마에게 정서적 차별을 받았다고 느낀 적은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늘 적극적이고 진취적었죠. 그런데 요즘은 모든 것에 초초하고 불안합니다.

남편과는 예나 지금이나 속 얘기를 전혀 안 합니다. 어쩌다 자녀 문제로 대화를 하게 되면 더 답답해지기만 합니다. 그런 저희 부부 관계에 평생 좌절하면서 제 아이와는 잘 지내고 싶었는데, 왜 이렇게 된 걸까요. 틀어진 가족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요.

김혜라(가명·55·주부)

혜라씨, 사춘기를 겪는 청소년 시기에 아이들은 부모와 다투기도 하고 사이가 멀어지기도 합니다. 정상 발달의 과정이죠. 다만 이때 행동은 사춘기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시기에 튀어나온 것일 뿐 엄마와의 관계 속에서 이미 과거부터 쌓여온 것일 수 있어요. 문제의 원인을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서 혜라씨 마음속에 자리 잡은 '불안'부터 살펴봅시다.

일단 혜라씨의 마음은 상당히 불안한 것 같아요. 부부간 부정적 감정이 딸에게 전달될까 봐 걱정을 하고, 잔소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불안이 커서 딸에게 더 심한 간섭을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죠. 머리로는 알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거예요. 그 불안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아마도 혜라씨 스스로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한 것이 하나의 원인일거예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제가 보기에 혜라씨는 완벽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에요.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효율'에 집중하게 되고, 효율이 떨어지는 것을 못 참는 경향이 있죠. 하지만 육아에 있어서는 효율이 독이 될 때가 있어요. 아이를 키우는 일은 사실 효율과 거리가 멀어요. 아이들이 높은 목표점을 향해 늘 효율적으로 따라오기를 바라는 것보다 길게 보고 천천히 바뀌는 걸 기대해야 하는 비효율에 가깝지요. 상황을 좋게 만들기 위해 잔소리를 하게 되면 자녀가 반감을 느껴서 효율은 더 떨어지고, 관계가 악화되는 악순환이 벌어지는 거예요. 효율이 오히려 비효율을 초래하는 것이죠.

청소년기의 아이들에겐 독립적으로 자율성을 추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부모와 깊이 있는 정서적 상호작용도 필요합니다. 이 과정이 없으면 막연한 불안감으로 힘들고, 실패에서 오는 좌절감을 크게 느껴요.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용기와 지지를 받고 해결하는 경험을 해야 하는데 아이는 혜라씨, 혹은 남편과의 관계에서 이런 과정을 경험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아이가 성적 이야기만 하면 엄마 탓을 한다고 했지요. 아이는 엄마의 기대를 잘 알고 있고, 본인 역시 공부를 잘하고 싶어해요. 하지만 결과가 따라주지 못해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오고, 잘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좌절감과 불안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지적해도 반복되고 있다는 '지각'처럼 불안을 회피하려는 문제 행동이 나타날 수 있어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우선 아이가 엄마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부모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아이와의 벽을 허물어야겠지요. '네가 잘되기 위해서는 내 말을 따르는 것이 효율적이다'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조금 거리를 두고 묵묵히 기다려주는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아이를 위하는 마음과 의도는 그대로 두되 말과 행동을 조금 바꿔보는 것이죠. '말하기'에서 '듣기'로 무게중심을 가져가는 것이 하나의 팁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할 거예요. 혜라씨는 나름대로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매진했고,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이 큰 사람이니까요. 다만 아이를 사랑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아닌 내면의 불안이 아이에게 전달되고 있는 게 아닌지 진지하게 돌아봐야 해요.

남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혜라씨는 가족에게 무심하고 자녀를 방관하는 듯한 남편의 태도에 큰 상처를 받았어요. 혜라씨가 인간 관계와 감정교류에 많은 비중을 두고 의미 부여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매사에 꼼꼼하고 효율적으로 임하는 혜라씨가 가정의 대소사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남편에게 요구했던 것들은 매우 정당한 일이었을 거예요. 자녀들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거나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 등의 요구는 정당했지만 남편은 당신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지요.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은 문처럼 남편이 답답하고 억울했을 거예요. 그때마다 혜라씨가 느꼈던 분노와 절망감을 너무나 공감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안타까운 점은 혜라씨가 남편에 대해 실망하고, 감정적으로 격해진 상황이 반복되어서 상대인 남편은 당신과의 갈등을 줄이기 위해 오히려 상황을 피해 왔다는 점이에요. 이른바 '추적형 아내'와 '회피형 남편'의 모습이죠. 마치 회전목마의 말처럼 서로 만나지 못한 채 공회전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잘잘못을 말하기 전에 남편은 은근슬쩍 넘어가는 자신의 태도가 혜라씨에게 어떤 좌절감을 주고 있는지 모를 수 있어요. 남편은 자신의 회피적인 태도가 문제라는 점을 알아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감정적으로 남편을 몰아세우기보다 좀 더 차분하게 힘든 부분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해요.

부부가 각자의 인식을 이해하고 정서적으로 소통하기 위해 부부상담을 받는 것이 좋은 방법입니다. 아무리 부부라도 성장과정과 기질이 다르고, 세상을 살아오면서 겪었던 어려움도 다릅니다. 상담은 이런 점을 인정하고, 각자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거예요. 제3자인 전문가를 통해 상대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건드려졌던 자신의 취약한 면을 알게 되면 그 감정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함께 상담받는 게 힘들다면 일단 한 사람이라도 먼저 상담을 받는 것도 방법이에요.

혜라씨는 늘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돌아보지 못했던 본인의 내면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불안이 줄고, 비로소 자녀 및 남편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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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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