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 '그들만의 리그' 지적
이사회 독립성·전문성 강화하고
'건강한 긴장관계' 문화 자리 잡아야
“은행은 민영화된 기업이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공공재다. 공정하고 투명하게 거버넌스를 구성하는 데 정부가 관심을 보이는 건 관치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난달 30일 윤석열 대통령 금융위원회 업무보고 마무리 발언)
금융지주회사의 지배구조 선진화가 정치권과 금융권 화두로 다시 부상했다. 최고경영자(CEO) 임기 만료 시점마다 끊이지 않는 ‘셀프 연임’ 논란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대두되면서다. 윤 대통령의 작심 발언에 제도 개선 작업도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CEO들이 적절한 감시와 견제 없이 연임에 유리한 환경을 만드는 ‘참호 구축(CEO entrenchment)’을 문제의 핵심으로 지목한다. 후진적 지배구조를 바꾸려면 ‘그들만의 리그’부터 깨야 한다는 지적이다.
"금융지주 CEO, 재벌그룹 회장처럼 행세"
금융지주회사는 소유 지분이 분산돼 있는 ‘주인(대주주) 없는 회사’다. 이런 기업에선 CEO가 경영을 대리하는데, 실제 권한은 대리인 수준을 훌쩍 넘어선다. 이사회에 ‘자기 사람’을 앉혀 참호를 판 다음 경쟁자를 제거하고, 장기 집권 기반을 다지는 게 관행처럼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대부분 금융지주에서 이사회는 곧 회장추천위원회이고, 계열사 사장추천위원회, 사외이사 추천위원회다. 의결권 없이도 CEO 뜻이 구석구석 미칠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조명현 고려대 교수(전 한국지배구조원장)는 “금융지주 회장이 다른 보통 재벌그룹 회장처럼 행세하는 것”이라며 “과점 체제하에서 국내 은행들은 기본적으로 실적이 좋을 수밖에 없고, 이사들이 회장추천위에서 뽑아주니 3연임까지 욕심을 내게 된다”고 진단했다. 조 교수는 금융위 업무보고에서 윤 대통령에게 직접 이 문제를 건의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간 금융지주 CEO들은 3, 4연임도 손쉽게 이뤄내며 장기 집권 체제를 구축해 왔다. 김정태 전 하나금융그룹 회장은 2012년 취임한 뒤 세 번 더 임기를 연장해 10년간 수장 자리를 지켰다. 2014년 취임한 윤종규 KB금융그룹 회장은 2020년 3연임에 성공, 9년째 KB금융을 이끌고 있다.
"안건 99.5% 찬성" 거수기 전락한 이사회
CEO와의 절묘한 밀월에 이사회 감시와 견제 기능은 무력해졌다. 주요 금융지주가 홈페이지에 공개한 지난해 이사회 활동 내용을 보면 대부분 안건이 원안대로 가결됐고, 수정 의결은 극소수에, 부결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사회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금융산업실장은 “지금의 금융지주 이사회는 거의 99.5% 찬성을 하는 거수기 역할을 하고 있다”며 “자기 연임을 위해 CEO를 지지하고, 성과급과 연동된 고위험 상품 판매도 오히려 부추긴다”고 비판했다.
이사회의 전문성 부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많다. NH농협금융지주 감사위원장을 지냈던 남유선 국민대 교수는 “아무리 잘 되어 있는 제도라도 이를 실제 작동하게 하는 이사회가 제대로 구성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면서 “친소 관계가 아닌 실무나 이론적으로 충분한 역량을 갖춘 이사들이 선임돼야 하는데 전문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주목받는 국민연금... 이사회 정보공개도
거론되는 개선책은 윤 대통령도 언급한 ‘스튜어드십 코드’ 강화다.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자가 투자한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 견제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소유분산기업인 KT 이사회가 구현모 대표이사의 연임을 결정했을 때 국민연금이 즉각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게 대표 사례다. 다만 기관투자자 역시 정치적 독립성과 전문성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이사회 구성과 운영 방식을 손질할 필요성 역시 제기된다. 남 교수는 “사외이사의 독립성 요건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지주와 관계 내역을 주주총회와 연차보고서 등을 통해 공개하도록 하면 정보공개 부담 때문에 선임 과정이 좀 더 공정하고 투명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사외이사들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정례화하고, 내부통제 부실로 인한 금융사고 발생 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내부 자성을 유도하고, CEO와 이사회 간 건강한 긴장관계가 문화로 자리 잡도록 적절한 보상(인센티브)을 병행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조 교수는 “지금은 이사들이 자기 시간을 열심히 써 가며 일하고, 때때로 경영진에 반하는 발언을 내놓을 유인이 없다”면서 “책임감 있게 이 정도 시간은 쏟아야 한다는 규정과 함께 그에 상응하는 보수를 지급하도록 하는 것이 문화를 바꾸는 첫 단추가 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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