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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같은 통일'…보수정권마다 반복되는 희망고문[문지방]

입력
2023.02.05 13:00
수정
2023.02.05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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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 "통일은 갑자기 찾아올 것"
이명박 전 대통령도 "도둑같이 올 것"
"北 경제난 심각…당장 불안 가능성 낮아"

북한 조선중앙TV가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당시인 2011년 12월 20일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된 김 위원장의 시신을 공개하고 있다. 평양=조선중앙TV 연합뉴스

북한 조선중앙TV가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당시인 2011년 12월 20일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된 김 위원장의 시신을 공개하고 있다. 평양=조선중앙TV 연합뉴스


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통일은 갑자기 찾아오겠죠. 준비된 경우에만 통일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지난달 27일 통일부 업무보고 중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이 미묘한 파장을 낳고 있습니다. 통일이 예고 없이 어느 날 불쑥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건 북한 체제의 붕괴 가능성을 암시하는 뜻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인데요. 통일부 관계자는 “대통령 메시지의 핵심은 ‘갑작스러운 통일’이 아닌 ‘통일 대비를 잘 하라’는 것”이라며 일단 확대해석을 경계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믿을 만한 대북 정보에 기반해 갑작스러운 통일을 언급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적지 않습니다. 통상 대통령의 발언은 철저한 계산에 기반한 고도의 정치적 메시지이기 때문이죠.

"北 GDP 5년 새 25% 감소…고난의 행군 초입과 비슷한 상황"

사실 '벼락같은 통일론'은 낯설지 않습니다. 2000년대 이후 들어선 보수정권은 모두 한 번씩 그 희망을 드러냈었죠.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1년 6월 “통일은 도둑같이 올 것이다. 한밤중에 그렇게 올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4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라는 귀에 쏙 박히는 표현을 썼죠.

두 전직 대통령의 발언은 모두 남북 갈등이 고조된 시기에 나왔는데요. 돌이켜보면 둘 다 틀린 얘기였지만, 당시에는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내놓은 발언이었습니다. 북한 내부의 어려움 탓에 정권이 붕괴될 수 있다는 보고에 기반을 둔 것이었죠.

통일이 벼락같이 찾아오려면 북한에 급변 사태가 있어야 합니다. 북한이 외부의 공격을 받아 체제가 무너지거나 내부 요인으로 김정은 정권이 붕괴돼야 가능한 일이죠. 실제 미국은 한때 다양한 북한 공격 시나리오를 검토하며 북핵 시설을 외과수술하듯 정밀타격하거나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제거하는 참수작전 카드를 살펴봤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겨냥해 "힘과 강압에 의한 일방적 현상 변경에 반대한다"고 밝힌 마당에 미국이 당장 북한을 선제타격하는 건 가능성이 높지 않죠. 외부 요인에 따른 북한의 급변 사태 가능성은 일단 접어둬도 될 듯합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020년 9월 황해북도 은파군 대청리 수해현장을 찾아 침수된 벼를 직접 살펴보며 피해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평양=노동신문 뉴시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020년 9월 황해북도 은파군 대청리 수해현장을 찾아 침수된 벼를 직접 살펴보며 피해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평양=노동신문 뉴시스

남은 가능성은 내부 요인으로 인해 북한이 저절로 무너지는 겁니다. 학계 연구 등에 따르면 몇 가지 시나리오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우선 경제난 탓에 붕괴할 가능성입니다. 북측 경제 여건을 살펴보면 전혀 불가능한 상상은 아니죠. 실제 북한은 코로나19와 대북제재, 수해 등 3중고가 겹치며 극심한 경제난과 식량난을 겪고 있으니까요.

북한 경제를 연구해 온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북한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은 5년 전인 2017년과 비교해 25% 감소했다"면서 "'고난의 행군' 초입부인 1995년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난의 행군은 1990년대 중후반 식량·경제난으로 북한 주민 수십만~수백만 명이 굶어 죽은 시기를 말합니다.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GDP가 30~40%가량 줄어들었는데요. 이 때문에 현재 북한의 경제난이 고난의 행군 이후 최악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죠. 다만, 김 교수는 "체제 붕괴는 경제난이 심각하다고 발생할 수 있는 일은 아니며 정치적 통제까지 허물어졌을 때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북한 주민들은 오랜 경제·식량난을 겪으며 '살아남는 법'을 체득했습니다. 통일부의 '북한 사회변동과 일상생활 : 공장과 도시의 변화를 중심으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북한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따른 생계난을 ‘투잡’을 뛰거나 공장 원료를 빼돌려 나눠 갖는 방식으로 극복하고 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김정은의 건강 이상 등 정치 상황 급변에 따른 붕괴 가능성입니다. 이 전 대통령이 ‘도둑 같은 통일’을 언급한 배경에도 당시 최고 지도자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 이상설이 근거로 작용했습니다.

국가정보원과 미 중앙정보국(CIA)은 김정일이 2008년 촬영한 뇌 컴퓨터단층촬영(CT) 사진을 구해 정밀 분석한 결과 "3~5년 내 사망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는 일본 아사히신문의 보도가 있었는데요. 실제로 김정일은 이 전 대통령의 발언이 나오고 6개월 뒤인 2011년 12월 사망했죠. 그러나 모두가 알 듯 통일이 도둑같이 찾아오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27세였던 어린 세습자 김정은은 큰 혼란 없이 권력을 틀어쥐었죠.

탁성한 국방연구원 미래전략연구위원장이 개발한 '북한체제 불안정 지수'에 따르면 지도자 유고 등 정치요인에 따른 북한의 불안정 지수(0~3점)는 '0'(2021년 기준)이었습니다. 사람 일이야 알 수 없지만, 이제 39세인 젊은 최고지도자가 건강 이상 등으로 갑자기 쓰러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 것이죠.

2020년 9월 북한 양강도 혜산시의 장마당에 주민들이 채소 등을 팔고 있는 모습. 창바이조선족자치현=연합뉴스

2020년 9월 북한 양강도 혜산시의 장마당에 주민들이 채소 등을 팔고 있는 모습. 창바이조선족자치현=연합뉴스

탁 위원장은 체제 붕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도미노 효과'를 꼽았습니다. 그는 "1990년대 초반 동구권의 연쇄 붕괴가 대표적인 사례"라면서 "우방인 중국이 내·외부적 요인으로 크게 흔들린다면 북한의 체제 불안도 커질 수 있지만 경제난 등 내부 요인만으로는 당장 큰 불안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탈북민 다수 "북한 정권 단기 붕괴 가능성 낮다"

그렇다면 북한에서 막 넘어온 탈북민들은 북한 체제의 붕괴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은 탈북민을 대상으로 의견을 물어왔는데요. 2020년 조사에서 북한 정권이 얼마나 유지될 것으로 보는지 묻자 '생각해 본 적 없다'(28.0%)거나 '30년 이상'(18.8%)이라고 답한 비율이 높았습니다. 반면, '5~10년'(20.5%)이나 '5년 미만'(9.3%)이라고 답한 비율은 낮았죠. 특히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2012년 이후 10년간을 살펴보면 '현 체제가 장기간 유지될 것'이라고 보는 의견이 추세적으로 오히려 증가해 왔습니다.

김병로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는 "북한 주민들은 대외 정보가 차단된 상황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 자주·자립적으로 사는 게 더 중요하다'는 사상교육을 꾸준히 받아왔기에 경제난을 겪으면서도 동요가 상대적으로 적다"고 설명했습니다.

정리하자면 김정은 정권의 붕괴는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높지 않은 상황입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 경제 위기가 정권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보다는 7차 핵실험 뒤 담판을 모색한다는 명분으로 대화 테이블에 나와 지원을 이끌어내려 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모든 시나리오에 대비한 통일 준비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희망고문에 묶여 대화와 타협 등 현실적 해결책을 등한시해선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북한 정권 붕괴론이 매번 틀리는데도 되풀이되는 건 내부 정치용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해석했습니다.


유대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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