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는 사람 취향 배려 없는 명절 선물
중고거래 되팔기 유행 '명절 테크'까지
간편한 모바일 상품권의 선호도 높아
경기 김포시에서 학원강사로 일하는 워킹맘 신모(45)씨는 명절 선물을 받을 때면 '고맙지만 난감한 상황'을 자주 맞이한다. 불경기에도 선물을 챙기는 상대방의 성의가 정말 감사하긴 해도, 막상 배달된 택배 상자를 뜯어보면 처리 곤란한 품목이 적지 않아서다. 그 중 가장 큰 고민을 안겨줬던 선물은 남편의 사업 거래처에서 보내온 황태포였다고 한다.
"통으로 된 황태포는 1년에 두어 번 제사·차례상에서나 쓰는 거잖아요. 저희 집은 몇 년 전부터 명절 차례상을 차리지 않거든요. 황태국을 끓여 먹으려 해도 손질이 많이 가는 재료라 솔직히 포장을 뜯을 자신이 없었어요."
고민거리였던 황태포 선물은 평소 친하게 지내는 동네 엄마들 중 원하는 사람들에게 '수요 조사'를 거쳐 나누는 방식으로 해결했다고 한다.
'집밥' 줄면서 식품 선물은 '애물단지'
황태포를 어렵사리 처리했던 신씨처럼, 집 안에 쌓이는 명절 선물세트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보낸 사람은 쓸모가 있을 거라 생각해서 준 것이겠지만, 막상 받는 쪽에서는 소화하기 어려운 선물들이 많다. 특히 받는 사람의 필요와 취향을 고려하지 않은 '판에 박힌 품목'들이 그렇다.
맞벌이나 1인 가구처럼 '집밥'을 해먹지 않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명절 선물의 대표 격이었던 식품류에 대한 만족도는 크게 줄어드는 모습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지난해 연말 발표한 '2022년도 가구의 식품소비 및 외식행태와 식생활 조사' 결과,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고 답한 가구는 63.2%에 그쳤다. 2013년 89.7%과 비교하면 집에서 조리를 하지 않는 비율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자기 취향이 확고한 MZ세대(1980년대~2000년대 초 출생)에게 샴푸 린스 바디워시 비누 등 생필품 선물세트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 품목 중 하나다. 12년 차 직장인 양모(38)씨는 "두피도 약하고, 환경 피해를 줄이기 위해 계면활성제가 없는 천연 비누 등 친환경 제품을 별도로 구입해 쓰고 있다"며 "일반 샴푸나 바디워시는 선물로 받아도 무용지물"이라고 난감해했다.
명절 선물 되팔기는 소소한 창조경제?
당장 쓸 일이 없거나 취향에 맞지 않는 명절 선물을 '실용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중고거래도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중고거래 대표 플랫폼인 당근마켓에는 스팸, 참치, 식용유, 홍삼 등 포장도 뜯지 않은 설 선물세트를 시중가 대비 가격을 한껏 낮춰 내놓은 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온라인에서는 회사에서 공짜로 받은 명절 선물세트를 되팔아 수익을 올린다는 뜻의 명절테크(명절+재테크)라는 말까지 회자될 정도다.
"선물 준 사람의 정성과 성의도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미 소유권이 넘어온 상황에서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을 쓰도록 하는 게 합리적 행동"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지난 추석에 이어 이번 설에도 스팸 세트를 받았다는 6년차 직장인 정모(32)씨는 "계속 안 먹고 묵혀둬 유통기한 지나서 버리느니 필요한 사람에게 판매하고 일주일 커피값이라도 챙겨볼 생각"이라며 "수요 없는 공급으로 방치하기보단 고물가에 한 푼이라도 벌 수 있는 게 그야말로 소소한 창조경제 아니냐"고 반문했다.
명절 선물이 되팔이의 상징처럼 인식되면서 선물 패턴의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대체재로 사랑받는 건 역시 현금이다. 트렌드 분석업체 캐릿이 지난 연말 2030 직장인(20~34세 312명 대상)에게 선호하는 명절 선물을 조사한 결과, 66.3%가 온라인으로, 모바일 상품권을 받기를 원했다. "주고 받기 편리한데다"(63.1%), "직접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22.5%), "과대포장을 줄일 수 있다"(3.4%)는 게 이유로 꼽혔다.
불필요한 과대 포장도 문제
선물을 주는 사람 입장에서도 모바일 상품권은 품목에 대한 고민을 덜어줄 수 있다. 서울 용산에서 컴퓨터 소프트웨어 소매업을 운영하는 김모(50)씨는 "거래처 명절 선물로 배, 사과 과일 세트를 보내왔지만 분실이나 변질 문제로 매년 골머리를 앓았다"며 "그러다 대형마트에서 쓸 수 있는 백화점 상품권을 모바일로 보내줬더니 다들 너무 좋아하더라"고 귀띔했다.
전문가들은 명절 선물 문화가 공급자 마인드에서 벗어나 수용자 중심으로 보다 '친절하게' 바뀔 필요성은 있다고 조언한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기업 입장에서 대량으로 싸게 구매해 일괄적으로 명절 선물을 뿌리는 형태가 반복되면서 받는 사람들의 만족감과는 상당한 격차가 있는 게 현실"이라며 "다양한 제품을 받아볼 수 있도록 선택지를 넓히는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농축수산식품의 경우도, 농어촌 경제 활성화를 위해 장려되는 게 맞지만, "불필요한 과대 포장으로 인한 환경 오염, 자원낭비를 막기 위해서 환경부의 지도가 강화돼야 한다"는 주문이다.
근본적으로 물건을 통해 마음을 전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필요도 있어 보인다. 이영애 인천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서구 문화권에선 직접 카드를 손수 써서 마음을 전하기도 한다"며 "우리도 '작은 선물' 풍토를 고민해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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