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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입력
2023.01.17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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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핼러윈 참사 직전 해밀톤호텔 뒷골목 모습. 한국일보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핼러윈 참사 직전 해밀톤호텔 뒷골목 모습. 한국일보

대통령을 향해 “무엇이 악의적이냐”고 항의할 정도로 권력 앞에선 '싸가지'가 없는 기자들도 주저하는 순간이 있다. 소중한 가족을 잃은 유족을 취재할 때다. 2017년 3월 세월호 선체 인양 당시, 사고 이후 1,000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차가운 바닷속에 가족을 둔 이들의 얘기를 들어야 했다. 질문이 혹여 상처를 들쑤시는 건 아닐까, 1시간 넘게 고민하다 겨우 용기를 냈다.

오래전 기억이 문득 떠오른 건 4일 국회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 때문이다. 유족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만큼은 경찰 지휘부도 그 절절한 고통 앞에서 무거운 책임감, 겸허한 자세 같은 수식어에 걸맞은 태도를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은 뻣뻣했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참사 당일 음주 여부를 묻는 질문에 “주말 저녁이면 저도 음주할 수 있다”고 항변했다. 경찰 14만 명의 준군사조직을 이끄는 청장이 술 마시고 자다가 참사 발생 2시간 뒤에야 상황을 인지해놓고, 뭐가 문제냐고 따진 셈이다.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은 한술 더 떴다. 그는 참사에 책임을 지겠느냐는 질문에 “제 잘못이 명명백백하게 가려질 때”라고 답했다. 사법적 잘못이 확정되면 그때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날 8시간 가까이 진행된 청문회에서 책임을 통감하는 최소한의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한 특위 위원은 “잘못을 인정하는 게 하나도 없더라”며 혀를 찼다. 사법적 책임과 별개로 “무한한 책임감을 느낀다”, “평생 죄인의 심정으로 살겠다”고 몸을 낮춘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과 정반대였다. 직속 상ㆍ하급자가 나란히 앉아 정반대 책임론을 말하는 이 장면이야말로 이날 청문회의 백미였다.

윤 청장과 김 서울청장은 누구보다 무한 책임을 통감하며 “내 탓이오” 해야 할 사람들이다. 사전 대책을 세우지 않은 건 물론, 참사 당일 ‘머리’ 역할을 하는 정보관은 이태원 일대에 한 명도 배치되지 않았고, 참사 4시간 전부터 압사 위험을 알리는 112신고가 이어졌지만 묵살됐고, 사고가 난 오후 10시 15분부터 11시까지 “살려달라”는 신고도 120건이나 빗발쳤지만 서울청 112상황실은 11시 39분에서야 윗선에 보고했다. “정보도, 교통도, 경비도, 112도 실패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특수본이 입건한 24명 중 13명이 경찰일 정도다.

그럼에도 두 사람 모두 책임질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이 “책임이라 하는 건, 있는 사람에게 딱딱 물어야지”라며 정무직 공직자의 책임 범위를 법적 책임으로 좁혀줬기 때문이다. 특수본이 ‘혐의 없음’ 처분을 내린 윤 청장이나, 아직 기소되지 않은 김 서울청장은 직을 유지하는 데 문제가 없는 셈. 법은 일선에겐 빡빡하고 고위층으로 올라갈수록 헐거운 터라 수사를 넘겨받은 검찰이 이들을 단죄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죽을힘을 다해 최선을 다했지만 참담한 결과에 너무나 죄송하다.”(유해진 소방관), “한 분이라도 더 구조하지 못해 죄책감에 시달린다.”(경찰관 A씨) 설령 과실이 있었더라도 현장에서 동분서주했던 실무자들은 수사ㆍ감찰, 죄책감, 트라우마의 삼중고에 시달리며 잠을 설치고 있다. 같은 날 캠핑장과 자택에서 숙면을 취하던 지휘부는 고개를 뻣뻣이 치켜든다. 이게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박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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