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사장 A씨 사연 온라인서 화제
"중학생 때 괴롭혔던 B씨 때문 극단 선택도 시도"
"B씨 보자 심장·손발 떨려... 채용 불가"
사장-구직자 '지위 역전'에도 통쾌함 보다 후유증
전문가 "상담치료 받으면 극복 가능"
학교폭력을 소재로 한 드라마 '더 글로리'가 인기를 누리는 가운데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한 학교폭력 피해자 사연이 최근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습니다. 지난 3일 온라인 커뮤니티 '보배드림'에 올라온 "학창시절 괴롭혔던 인간이 오늘 면접 보러 왔네요"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작성자는 화물운송업체 대표 A(43)씨입니다. 이날 기사 채용면접에서 응시자 중 한 명이 낯익어 신분증과 면허증을 보니 중학생 시절 자신을 지독히 괴롭혔던 동급생 B씨였던 겁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마주친 겁니다.
2,950자에 달하는 A씨 사연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30년 전 시골 작은 중학교에 입학 후 3개월 쯤부터 B씨 일당이 물건과 돈을 뺏는 건 둘째 치고 오락실로 불러내 다른 친구와 서로 뺨을 때리고 싸우라 해 반강제로 다투고, 참새나 개구리를 잡아와 커터칼을 주며 '배를 가르라'고 시키고, '못 하겠다'고 하면 다른 친구를 시켜 배를 가른 개구리와 참새를 저에게 묻히며 감정적으로 많이 괴롭혔다"는 겁니다. 속옷에 얼음을 넣기도 했답니다.
괴롭힘이 계속돼 A씨가 선생님께 얘기하자 교사는 두 사람을 중식당으로 불러 "친구끼리 그러면 안 된다", "작은 동네니까 어른 되면 친구가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된다"며 '억지 화해'를 시킵니다. 이후 B씨는 기분이 나빴는지 더 괴롭힙니다. 결국 A씨는 부모에게 말하고 그날 가해자들을 공책에 적은 뒤 농약을 마셨는데, 다행히 부모가 발견해 지역 큰 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을 건졌답니다.
누군가 이 사건을 제보해 지역 언론에 나왔습니다. 학교는 부모들을 불렀는데,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고, A씨에게 전학을 권유했다고 합니다. 피해자를 분리하겠다는 취지로 추측됩니다만, A씨는 정신과 치료 후 전학 권유를 거절하고 그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대신 과거를 잊으려 개명하고, 집에서 좀 떨어진 고등학교로 진학(B씨는 다른 고교 진학)합니다. 아버지의 반강제적 권유로 2년을 함께 운동하고, 키와 덩치도 커져 고등학생 때는 조용히 지냈대요. 군 전역 후 20대 후반에 화물트럭 운전을 하고, 아내도 만나 아들, 딸 낳아 가정도 꾸렸습니다.
그렇게 학창시절 기억을 잊고 지내다 갑작스레 B씨를 마주한 겁니다. A씨는 자신도 모르게 손이 떨리고 아무 말도 못하다 차분히 개명 전 이름을 대며 "나 못 알아보겠느냐"고 물었습니다. B씨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몰라봤다. 미안하다"고 답했습니다. A씨는 "아니다. 키도 많이 크고 나이를 먹었으니 그럴 수도 있지. 나도 많이 놀랬다"며 "짐작하겠지만, 너를 채용할 수가 없다. 이해해라"고 말했습니다. B씨도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만 일어나겠다"고 한 뒤 자리를 떴습니다. B씨 서류를 보니 결혼했고, 일곱 살 아들 하나를 뒀대요. 복잡한 감정과 분노를 추스르며 쓴 글에는 이런 대목도 나옵니다.
"가끔 학폭 뉴스를 접하면 과거를 회상하며 당시 괴롭힘을 당한 이유는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하며 살았는데, 오늘 이 인간을 마주하고 심장이 미칠듯이 뛰고,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저를 보면서 토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 글을 남겼다. 이 글을 보게 될 지 모르겠지만, 네가 정말 불행했으면 좋겠다. 너를 선택한 너의 가족과 아이가 능력없는 너 때문에 하루 한끼를 챙기기도 힘들게 살며 몸부림치면 좋겠다."
이 글은 조회수 20만9,000여회, 댓글 726개가 달릴 정도로 화제가 됐습니다. 일부에선 "꾸며낸 얘기 아니냐"고 의심했는데, A씨는 4일 다시 글을 올려 "정말 꾸며낸 이야기로 보이냐. 이게 유소년기 학폭 트라우마"라고 했습니다. 또 "학폭 피해 경험을 아직 아내와 자녀들이 모른다"며 "평생 치부를 숨기고 버텨오다 말할 곳이 없어 불안함과 두려움을 떨치려 글을 남겼다"고 강조했습니다. A씨 글을 읽은 전문가도 "글 내용만 봐서는 지어낸 것 같지는 않다"(김태경 서원대 상담심리학과 교수)고 평가했습니다.
한국일보 인터뷰 요청에 A씨는 "14살의 저를 다시 끄집어 내야하는데, 저 혼자만 짊어지면 될 상처를 나누기 싫은 사람들과 걱정끼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곁에 너무 많다"며 완곡히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아직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A씨에게 도움을 주고자, 사연을 바탕으로 상담심리학자, 학교폭력전문기관, 법률가 등에게 자문을 구해 무엇이 잘못됐고, 트라우마 극복방법은 없는지 등을 알아봤습니다. 다행히 "학폭 피해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학폭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법은 있다"고 합니다.
'억지화해'부터 잘못됐다
김태경 교수는 4일 통화에서 먼저 "교사의 '억지 화해'가 매우 잘못됐다"고 지적했습니다. "피해자는 가해자랑 만나 밥 먹는 것 자체가 두렵고 고통이었다"는 겁니다. 그는 "용서를 논하거나 용서할 권한은 피해자 본인에게만 있고, 교사는 용서라는 말을 쉽게 꺼내면 안 된다"며 "교사의 권한을 잘못 사용해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세레머니를 한 셈"이라고 했습니다. (요즘엔 학교가 피해자 의사를 먼저 물어본다고 합니다.) 피해자는 쉽게 용서할 수 없어 사과받을 마음의 준비도 필요하다는 것이죠.
김 교수는 또 "학교폭력이 아주 특별하고 세심하게 상담지원하지 않으면 극복이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가정폭력처럼 가장 안전해야 되는 공간에서 벌어져서죠. 그는 "아이들은 집보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고, 청소년기 교우관계는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청소년기 학교폭력은 성인 때 누군가에게 폭행·치상 당하는 것보다 훨씬 상처가 심하다"고 했습니다.
사장(피해자)-구직자(가해자) 뒤바뀐 지위, 피해자가 승자?
A씨 글에 "구직자인 B씨가 제 앞에서 바른 자세로 앉아 수그리고 있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는 구절이 있고, "현재는 작성자가 승자"라는 댓글도 있었습니다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두번째 글에서 "B를 마주친 순간 저의 자존감은 14살 때로 바닥을 쳤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며 "그때나 지금이나 두려움을 깨부술 수 없다"고 썼습니다.
김 교수는 "A씨는 가해자를 보는 순간 감당하기 어려운 공포와 분노를 느껴 정신적으로는 피해 당시로 되돌아갔고, 보복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감정임을 아는 것 같다"며 "B씨 입장에서는 하필이면 어릴 때 괴롭혔던 만만한 아이가 사장이니까 상처받지 않았을까?"라고 했어요. 이어 "고용자-피고용자로 지위가 완전히 뒤바뀌어 피해자가 '복수했다'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는데, A씨는 카타르시스를 느껴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후유증이 강한 것"이라고 분석하며 전문적인 상담을 권했습니다.
"트라우마 극복 가능"
그렇다면 트라우마 극복이 가능할까? 김 교수는 "불가능하지 않다"고 합니다. "트라우마가 없었던 때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해도 트라우마를 자기 삶의 일부로 통합(해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도록)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겁니다. 트라우마 치료는 심신을 안정화한 다음 사건을 직면하는 것이 핵심이래요.
"끔찍한 기억을 불러오기 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안정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예컨대 호흡 등을 통해 스스로 진정시키는 것이죠. 가장 덜 스트레스 받는 기억을 떠올린 뒤에 호흡으로 달래고, 점점 떠올리는 기억의 강도를 높여요. 이런 연습이 충분히 되면, 처음엔 기억에 압도돼 큰 스트레스를 받다가 그 강도가 조금씩 줄어듭니다. 나중에는 그 기억을 떠올려도 '괜찮아, 어엿한 성인이 된 지금은 내가 세상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느끼고, 그 감각에 의지하게 되죠."
김 교수는 "주로 범죄피해자를 상담하는데, 대부분 주저앉지 않고 정말 감탄할 정도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분들을 수없이 만났다"고 합니다. 또 "너무 무서운 기억이라 완전히 억압하면 어느날 갑자기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가 나타나기도 하니까 충분히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위로·지지받으면 된다"고 북돋았죠.
"피해경험 공개해 위로 받아야"
그런데 A씨는 아내에게도 피해 경험을 알리지 않고, 익명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자신의 사연을 공개했죠. 이 점을 근거로, 학교폭력 예방·치료를 위해 설립된 기관 '푸른나무재단'의 김석민 상담본부 팀장은 "댓글을 통해 공감·응원받거나 소통하면서 힘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지만, 상담받거나 이야기할 용기가 아직 없다"고 해석했어요.
그 이유는 '창피하다' '가족이 몰랐으면 좋겠다' '얘기하면 혹시 문제가 되지 않을까' 등 여러가지 일 수 있지만, 김 팀장은 "회사 사장인 A씨처럼 사회적 지위가 있으면 '학폭 피해자라고 공개했을 때 주변에서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남의 시선 의식'이 큰 원인일 수 있다"며 "털어놨을 때의 후련함처럼 긍정적인 측면은 간과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보통 10회, 길면 20회인 전문가 상담에서도 '혼자 감내하기 어려우니 가장 가까운 사람과 피해 경험을 나누라'고 한다"며 "누군가가 알면 격려·위로받고, 안정감을 줘 큰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어요.
그는 "40, 50대는 물론 60대 이상 어르신이 재단으로 연락주는 경우도 있는데, 보통 가해자 이름, 생김새, 언제 어디에서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생생히 기억한다"면서도 "이들이 가족이나 지인에게 경험을 얘기할 때 '다 큰 어른이 아직도 그걸 기억하냐'는 식으로 핀잔을 주면 안된다"고 당부했습니다.
"가해차 처벌·피해보상은 어려워"
A씨는 "B씨가 학교에서도 처벌 안 받았다"고 주장했는데요. 지금이라도 형사처벌이 가능할까요? 안타깝게도 어렵다고 합니다.
대한변호사협회로부터 '학교폭력 전문 변호사 1호' 인증을 받은 노윤호 변호사(법률사무소 사월 대표)는 "일반적인 신체폭행이나 모욕, 명예훼손의 공소시효는 5~7년이고, 특수상해도 길어야 10년이라 (30년이 흐른 B씨를) 고소하기 어렵다"며 "피해보상을 받기 위한 민사소송도 소멸시효가 피해를 안 날로부터 3년, 뒤늦게 정신적 트라우마를 알았다고 해도 10년"이라고 했습니다. "B씨를 마주한 순간 트라우마가 나타났어도 괴롭힌 시점부터 10년이상 지났고, B씨가 면접장에 나타난 것은 불법 행위가 아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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