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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의 자유'에 앞서야 하는 것들

입력
2023.01.07 04:3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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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진
최연진IT전문기자
경기 판교의 구름다리로 연결된 알파돔시티 전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경기 판교의 구름다리로 연결된 알파돔시티 전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정보기술(IT) 기업과 신생기업(스타트업)들이 모여 있는 경기 성남시 판교에 유명한 '이직의 다리'가 있다. 판교역 근처 알파돔 건물과 카카오, 크래프톤 건물의 3층을 연결하는 구름다리다. 이 다리 주변에 네이버, 카카오, 넥슨, 엔씨소프트, 스마일게이트, 크래프톤 등 IT기업과 스타트업들이 모여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잠깐 다리를 건너가 면접을 보고 회사를 옮길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이직의 다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예전과 달라졌다. 예전에는 IT기업과 스타트업들 주가가 올라가며 덩달아 귀한 대접을 받은 사람들이 몸값을 올릴 수 있는 기회의 상징이었다면, 지금은 생존을 위해 새로운 일터를 찾아야 하는 고달픈 상징으로 바뀌고 있다.

IT기업과 스타트업들은 올해 화두로 단연 이직을 꼽는다. 지난해 이어 올해도 경기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며 자의반 타의반 이직이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미 일부 스타트업들은 소리 없이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한때 이용자가 급증하며 기업가치 1조 원 이상 유니콘이 될 것으로 평가받은 영어교육 스타트업은 새로운 사업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대부분의 직원을 내보냈다. 불과 몇 달 전 만났던 홍보팀이 통째로 사라진 스타트업도 있다. 모 스타트업 직원은 옮긴 지 4개월 만에 구조조정으로 다른 직장을 찾아야 했다.

당연히 채용시장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인력관리업체 인크루트가 지난 3일 기업 채용담당자 681명을 대상으로 신년 채용 동향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0%가 올해 채용 계획을 축소했거나 취소했으며 32%가 수시 채용으로 전환했다. 더불어 응답자들은 조용한 사직 열풍(25%)과 활발해지는 이직 시장(20%)을 올해 주요 채용 이슈로 꼽았다.

그 바람에 이직을 항상 염두에 두는 직장인들도 늘고 있다. 인력관리업체 사람인이 지난 3일 직장인 1,47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 당장 이직 계획이 없어도 취업 전문 사이트에 이력서를 항상 올려놓고 기다리는 응답자가 62%였다.

중요한 것은 달라진 채용 문화를 받아들이는 기업과 사람들의 자세다. 과연 기업과 사람들은 자유로운 이직에 대한 준비가 제대로 돼 있을까.

지난해 말 경기 침체를 우려한 미국 대형 IT기업들이 구조조정을 한다는 소식이 많이 나왔다.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해고를 통보하는 미국 기업들의 행태에 관심을 집중했지만 정작 뒤에서 일어나는 일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 기업들의 인력관리 조직은 채용 못지않게 해고자들의 재취업 프로그램을 철저하게 갖추고 있다.

2011년 휴대폰 사업을 구글에 매각한 모토로라는 몇 달에 걸쳐 일자리를 잃게 된 직원들을 위해 재취업 프로그램을 가동하며 인력전문업체를 통해 다른 직장을 알선해 주고 새로운 직업 교육까지 실시했다. 해외 직원도 예외가 아니었다. 2013년 모토로라코리아가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몇 달에 걸쳐 재취업 프로그램을 가동해 많은 직원들이 다른 기업으로 이직했다.

우리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지만 미국과 비교하면 갈 길이 멀다. 노동 유연성을 강조하려면 해고의 자유로움에 앞서 재취업과 이직을 위한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우리 기업들 가운데 직원들의 재취업과 이직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대로 가동하는 곳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그렇지 못하니 미래가 불안한 계약직이나 플랫폼 노동자가 늘어나고 노동조합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진정한 노동개혁은 재취업과 이직 등 취업 확대를 위한 사회적 시스템을 갖추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최연진 IT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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