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에 고강도 도발 명분 빌미 될라
'9·19 군사합의' 파기 신중했지만
소형무인기 영공 침범이 결정타
'합의 파기' 대신 '효력 정지 검토'
윤석열 대통령이 4일 분단체제에서 ‘최후의 안전장치’인 9·19 남북군사합의 무력화 카드를 꺼낸 건 더 이상 북한의 노림수에 끌려 다니지 않겠다는 결단으로 볼 수 있다. 지난달 26일 북한 소형 무인기 5대가 군사분계선(MDL) 이남에 침투한 것이 결단을 앞당긴 방아쇠가 됐다. 정부가 그간 북한의 숱한 도발에도 문재인 정권의 유산인 9·19 군사합의 파기에 신중했던 데는 전략적 판단이 컸다. 우리가 먼저 파기하면 북한이 향후 도발의 명분으로 삼으며 역이용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를 우려한 듯 윤 대통령은 이날 ‘합의 파기’ 대신 ‘효력 정지 검토’라는 단어를 써가며 수위를 조절했다. 먼저 합의를 파기하는 책임을 면하는 동시에 향후 도발할 경우 효력을 정지할 수 있다는 경고 메시지를 북한에 던진 것이다. 그러나 남북 강 대 강 대치 국면에서 9·19 군사합의마저 사문화되면 우발적 충돌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은 여전히 문제로 지적된다. 한반도 긴장 관리가 어려워져 이른바 '코리아 리스크'가 커지면 우리에게도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어서다.
군 당국 “北 군사합의 위반, 총 17건”
2018년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 후속조치로 체결된 9·19 군사합의는 지상과 해상, 공중에 각각 완충구역을 설정해 상호 적대 행위를 금지하는 것이 골자다. 연평해전과 같은 우발적 충돌로 인한 비극을 막자는 취지다.
2019년 11월 창린도 포 사격이나 2020년 5월 우리 군 감시초소(GP) 총격 같은 우발적 또는 소규모 도발을 제외하면 초반에는 비교적 합의가 잘 지켜졌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위반 사례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지난해 10월 14일 하루에만 동·서해 해상완충지대로 역대 최다인 560발 포 사격으로 전운을 고조시키는가 하면 11월 2일에는 6·25 전쟁 이후 처음으로 북방한계선(NLL) 이남 우리 영해 인근으로 미사일을 쐈다. 군용기 수십 대를 동원한 위협 비행도 잦았다.
군 당국은 “북한이 명시적으로 9·19 합의를 위반한 건 무인기 침범까지 포함해 17건이고 이 중 15건은 지난해 10월 이후 발생한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달 26일 무인기 침범에 상응해 무인 정찰기 두 대를 북한 영공에 보낸 것을 포함, 우리 군이 맞대응 성격의 조치를 취하며 합의를 위반한 것은 3건으로 알려졌다.
‘한반도 화약고’ 재현되나
9·19 군사합의는 남북 어느 일방에 유리하거나 불리한 합의는 아니다. 물론 군사분계선 5㎞ 이내와 NLL 일대에서 포 사격이, MDL 10~15㎞ 내 무인기 비행이 전면 금지되면서 해·공군력이 열세인 북한 입장에선 군사적, 경제적 부담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었다. 또 접경 지역에서 우리 군 훈련에 차질이 생겼고 대북 정찰 활동에 제약도 컸다. 하지만 우발적 충돌을 방지하는 안전판이라는 점에선 우리에게 이득도 없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합의 효력이 정지되면 북한의 도발 증가는 예고된 수순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다만 한반도 긴장 관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선 해석이 갈렸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이 계속 도발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일종의 ‘한국판 레드라인’을 북한에 제시함으로써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반면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남북 간 군사적 신뢰 구축이나 대화 채널이 없는 상태에서 마지막 완충지대마저 없다면 오판으로 인한 양측의 충돌 가능성이 커지면서 한반도 내 긴장 관리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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