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쓰촨 ⑦정군산 무후묘와 무후사, 석문잔도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 편을 읽다가 화들짝 놀랐다. 다분히 중화주의에 경도된 관점은 그렇다 해도 중국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오류투성이라 정오표를 써서 공개하고 나서야 조금 진정이 됐다.
“유홍준이 책에서 그러던데!”라고 하면 나로선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다. 대서 특필할 만한 오타(?)도 있으니 ‘제갈량의 실제 무덤이 성도 무후사에 있다’는 대목이다. 제갈량 사당인 무후사(武侯祠)는 중국 전역에 10군데가 넘는다. 사당이 곧 무덤도 아니다. 제갈량의 무덤은 산시성(陕西省) 한중 땅 몐현에 있다.
진수는 정사 ‘삼국지’ 촉지(蜀志)에 ‘(제갈량이) 후주 유선에게 만약 자신이 죽으면 비단으로 감지 말고 재물을 많이 쓰지 말라 당부했고, 그대로 했다’고 기록했다. 제갈량은 몐현에서 동북쪽으로 240㎞ 떨어진 오장원(五丈原)에서 사망했다. 몐현의 정군산(定軍山) 아래에 묻어달라 했다.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기가 어렵다. 번호판 없는 소형차 기사와 눈이 맞았다. 몌현 시내를 가로지르는 한강(漢江)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간다. 치열한 전쟁터였다던 정군산은 한산하다. 거문고를 연주해 공성계(空城計)로 사마의 군대를 물러나게 한 제갈량이었다. 악기 소리 날 리 없고 녹이 덕지덕지 붙은 조각상은 애처롭기조차 하다.
오장원에서 사망한 제갈량... 몐현 정군산에 잠들다
군대를 지휘하는 독군대(督軍臺)가 설치돼 있다. 북벌 총지휘관인 제갈량이 부채를 들고 수염을 어루만지며 바람이라도 일으키고 있었는지 모른다. 정군산 전투에서 촉나라의 노익장 황충은 위나라 장수 하후연을 격퇴시켰다. ‘물리쳤다’고 짧게 기록한 정사의 문구가 소설에선 화려하게 묘사된다. 두 동강내는 무용담이다. 조각상은 긴 칼이 가슴 부위에 멈춰 곧 싹둑 베어낼 기세까지 담았다.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짜릿하다.
2㎞ 떨어진 거리에 제갈량의 무덤인 무후묘(武侯墓)가 있다. 붉은 담장 앞에 검은 조벽이 있고 초록의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깨끗하게 잘 정돈된 유적이라는 느낌이다.
대전으로 들어가니 감실에 제갈량이 단정하게 좌정해 있다. 청색 실로 짠 윤건을 쓰고 화려한 도포를 두르고 있다. 오른손은 가지런히 무릎을 쓰다듬고, 왼손엔 책 한 권을 들고 있다. 검과 관인을 든 시동이 양쪽에 서 있고 감실 밖에 관우와 장비의 아들인 관흥과 장포가 협시하고 있다. 오랜 세월 높은 지위를 유지한다는 만고운소(萬古雲霄) 편액이 걸려 있다.
봉긋한 무덤이 있다. 높이 4m, 지름 20m, 둘레 64m로 제법 크다. 팔괘를 본떠 팔각형 무덤이다. 제갈량의 일생을 새긴 석판 35개가 무덤을 감싸고 있다. 5칸마다 돌 사자 하나가 걸터앉아 노려보고 있다. 주위에 계수나무 두 그루가 솟아있다. 거의 20m다. 누가 심었는지 모르나 오랜 세월 무덤의 영양분으로 살았다.
제갈량 사후 부인 황월영이 묘를 지키다 죽었다. 부인이 흘린 눈물의 화신이란 전설이다. 묘비 위에 쌍계유방(雙桂流芳)이 적혀 있다. 계수나무가 아름다운 명성을 길이 남긴다는 뜻이다. 나무에 감정이입하고 있음이다.
서쪽에 머리가 있고 동쪽으로 발이 놓였다고 전해진다. 묘비는 보통 머리 쪽에 위치하는데 반대로 무덤을 썼다. 서쪽 촉나라를 영원히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명나라 만력제 시대 섬서안찰사(陝西按察使) 조건이 세웠다. 관할 구역 수장이니 자격이 있었다.
제갈량 이름 앞에 금릉(金陵)이라 썼다. 호가 아니라 출신을 적는 경향이다. 지금의 난징이다. 한승상제갈충무후지묘(漢丞相諸葛忠武侯之墓)라 썼다. 이를 새긴 지현과 천호의 이름도 나란히 적었다. 함께 조각했다고 동(同)과 동의어를 써 동전(仝鐫)이라 했다. 옆에 청나라 옹정제의 17번째 동생인 과친왕이 세운 묘비가 있다. 황족의 품위를 지키려고 기단에 용을 새겼다.
삼국지의 또 다른 영웅… 몐현 마초 무덤과 무후사
한강을 건너 몌현 시내로 되돌아온다. 서쪽으로 5분 정도 가니 도로 북쪽에 마초묘(馬超墓)가 보인다. 곧바로 원통문(園洞門)이 나오고 묘비와 무덤이 한눈에 나타난다. 그다지 넓지 않다. 묘비에는 한정서장군마공초묘(漢徵西將軍馬公超墓)라 적혀 있다. 청나라 건륭제 시대 병부시랑(차관)이자 섬서순무(陝西巡撫)인 필원의 서체다. 소설에서 한신과 영포만큼 용맹하고 관우와 장비만큼 영웅이라 치켜세운 마초가 아닌가. 높이 3m, 둘레 56m로 무덤도 꽤 성대한 편이다.
마초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일세지걸(一世之傑) 전각이 있다. 삼국지를 그린 벽화 중 ‘마(馬)’ 깃발을 들고 진군하는 모습이 있다. 소설에서 여포와 함께 공력으로는 최고라 할만하다. 가맹관에서 세기의 대결인 장비와 마초가 싸운다. 용호상박이라 극찬한 명승부다.
경극에서 삼국지를 소재로 한 레퍼토리는 100여 개에 이른다. 가장 화려하고 인기가 높은 공연 중 하나가 ‘전마초(戰馬超)’다. 베이징 경극 전문 극장인 이원(梨園)에 가면 볼 수 있다. 낮에 시작해 밤까지 전투를 한다. 제목이 마초에 대한 공격 같다. 그런데 오히려 마초를 멋지게 그리고 있다. 20분이 마치 2분처럼 지나간다. 흰색에 파랑이 섞인 옷이 선명한 인상을 풍긴다.
500m 떨어져서 도로 남쪽에 무후사(武侯祠)가 있다. 제갈량 흔적이 있는 지방이라면 사당을 세웠다. 몐현 무후사는 무덤 옆이라 가치가 높다. 무후사는 유비 무덤이 있는 청두, 제갈량이 거주했다고 알려진 샹양과 난양, 유비 유언을 받은 펑제, 사망 장소인 치산, 심지어 소수민족이 사는 바오산과 량산에도 있다. 몐현 무후사는 5만㎡가 넘고 30개의 전각, 150칸 규모다. 제갈량 사후 29년 만인 263년에 유선이 조서를 내려 건축했다.
무대가 열리는 악루(樂樓)를 지나면 천하제일류(天下第一流) 패방이 이어진다. 문무를 겸비한 천하제일의 품위를 지닌 인물이란 찬사의 글씨로 뒤쪽에 있다. 흰색 바탕에 5글자가 전부다. 누가 언제 썼는지 알 수 없으니 참 이상하다. 앞쪽에 금빛으로 한승상제갈무향충무후사(漢丞相諸葛武鄉忠武侯祠)가 번쩍거린다. 청나라 동치제 시대 1867년 늦은 봄에 썼다고 깨알같이 적혀 있다.
거문고를 위한 누각인 금루(琴樓)가 있다. 왼쪽에 동한 시대의 석양(石羊)이 있다. 오래 살고 싶으면 돌로 태어나면 된다. 산산조각 나지 않았으니 2,000년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2층 누각에는 서진 시대의 책상과 석금(石琴)이 있었는데 문화혁명 시기 훼손됐다.
아래에서 보니 2층에 제갈량이 성벽 위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는 장면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설가의 상상력은 대단하다. 성문을 비우고 거문고 소리로 적장 사마의 심리를 간파했다. 실제 역사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니 제갈량의 계책이 아님은 분명하다.
금루를 지나니 오른쪽 담장이 독특하다. 벽돌로 팔괘와 태극, 부채 모양을 꾸몄다. 여러 번 중건을 거치며 많은 벽돌을 사용했다. 무후사에서 출토된 벽돌로 만든 담장이다. 전문가가 아니어서 모르겠으나 시대별로 서로 다른 형식일 듯하다. 무늬도 다양하다. 마름모, 구름, 풀잎, 격자, 톱니 등이다. 벽돌 전시실을 만들지 않고 담장 벽돌에 끼울 생각을 하다니 신기하다.
고관대작 대문인 극문(戟門)을 지나면 배전(拜殿)이다. 공적이 탁월한 인물에 대한 아낌없는 극찬인 대한일인(大漢一人)이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한나라의 복원을 평생 신념으로 살아간 유학자 제갈량이다. 황제가 된 유비에 대한 배신감도 상당했다. 둘 사이의 삼고초려는 소설이고 오히려 정적에 가까웠다.
제갈량에게 대촉일인(大蜀一人)은 어울리지 않았다. 천하기재(天下奇才)도 당당하게 붙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민망하다. 사마의가 제갈량에게 했던 말이다. 결국 이긴 사마의는 천하의 기재 이상의 능력을 지녔다는 호기였다. 산고수장(山高水長)도 참 한가한 느낌이다.
대전(大殿)의 제갈량과 시동, 관흥과 장포의 배치는 무후묘와 똑같다. 시동이 검과 관인을 들고 있는 자세도 한결같다. 제갈량 모습만 달라서 왼손은 무릎을 감싸고 오른손은 부채를 들고 있다.
편액은 두 개다. 아래는 충관운소(忠貫雲霄)로 충성심이 하늘 높이 꿰뚫어 고상한 품위를 지녔다. 위에는 지성지천(知性知天)으로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자가 천명을 안다는 뜻이다. 민심도 모르는데 하늘의 뜻을 안다고 하면 큰일이란 경고다. 정말 제갈량은 지천명(知天命)이었다는 말인가?
여기도 삼국지 명소, 석문잔도
버스터미널로 간다. 한중 땅 북쪽에 있는 석문잔도(石門棧道)가 목적지다. 한 아저씨가 친절하게 포하(褒河) 가는 버스를 타라고 알려준다. 시내로 갔다가 다시 갈아타고 갈 줄 알았는데 직접 가는 버스가 있다. 40분 만에 포하 입구에 도착했다.
예로부터 한중에서 진령(秦嶺)을 넘어 장안(지금 시안)으로 가는 고도는 4곳이었다. 동쪽부터 자오도(子午道), 당락도(儻駱道), 포사도(褒斜道), 진창도(陳倉道)다. 포사도가 지나는 곳이 석문이다.
기원전부터 포하를 따라 형성된 협곡에 잔도를 설치했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드라마틱한 전투의 현장이 됐다. 전쟁이 물러나자 문인의 발걸음이 잦아졌다. 바위 위에 감성을 배설하기 시작했다. 세월이 지나니 그야말로 석각 전시장이 됐다. 1975년에 댐이 생겼다. 활처럼 생긴 댐의 길이가 260m이고 높이가 88m다. 수심이 엄청나게 깊어졌다. 수장되기 전에 석각을 모두 한중시박물관으로 옮겼다.
댐 위를 지나 잔도를 따라 상류로 천천히 걷는다. 강물은 고요하고 잠잠하다. 점점 강폭이 좁아진다. 삼국시대 흔적은 아니어도 잔도는 아슬아슬해 보인다. 튼튼하다고 믿지만 발 밑바닥이 간질거리긴 한다.
진귀한 보물인 괴보(瑰寶)라 불리는 석각은 모두 13개다. 석문십삼품(石門十三品)이라 한다. 막고굴의 서양 도굴꾼(?)이 그랬던 것처럼 잘근잘근 조각조각 뜯어냈다. 9품이 곤설(袞雪)이다.
잔도 끝까지 걷고 다시 돌아서 문화광장으로 간다. 삼국시대 조각상이 많다. 조조가 썼다는 곤설이 새겨져 있다. 물론 진품이 아니다. 부드럽고 물 흐르는 듯한 예서체가 바위 속으로 붉게 물들어 있는 모습이다. 도도히 흐르는 포하의 물이 마치 눈이 물보라를 일으켜 또르르 구른다고 생각했다.
곤(衮)은 곤룡포라는 뜻이다. 부하 장수가 조심스레 삼 수(氵)가 빠졌고 구르다는 곤(滚)이 아닌가 물었다. 문인의 감성이 뛰어난 조조가 아니던가. 일하류수(一河流水), 기결수호(豈缺水乎)라 했다. ‘강에 물이 이렇게 많은데, 아직 모자란다는 말인가’라는 미담이다.
벽화도 많다. 삼국지 인물이 총동원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흥미롭게도 얼굴 모습이 조금 낯익다. 석문잔도를 지나는 조조의 군대를 그린 벽화도 그렇다.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장면도 마찬가지다. 선입견인지 몰라도 2010년에 방영한 95부작 드라마 ‘삼국지(가오시시 연출)’에 출연한 배우와 너무 비슷하게 생겼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어 다시 한번 찾아봐도 많이 닮았다. 드라마 인기에 힘입어 재미난 광장을 조성했다.
포사(褒姒)의 고향이기도 하다. ‘사기’에 주유왕(周幽王)이 왕후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시경’에 따르면 번성했던 주나라는 포사가 멸(滅)했다. 웃지 않는 전술로 왕을 꼬드겼다. 적이 침공해 왔을 때 봉화가 올라도 지원군이 오지 않았다는 '봉화희제후(烽火戲諸侯)'는 두고두고 교훈이 됐다.
망국의 요희(妖姬)이자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 수천 년을 욕먹었다. 억울할지 모르겠다. 나라가 망했으니 부패한 왕과 왕후라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포사는 억울할 필요가 없다. 고향의 폭포 아래 미모를 자랑하며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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