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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듯 쓸모없는 존재는 없다

입력
2022.12.28 19: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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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박주영부장판사

편집자주

<어떤 양형 이유> <법정의 얼굴들>의 저자인 박주영 판사가 세상이란 법정의 경위가 되어 숨죽인 채 엎드린 진실과 정의를 향해 외친다. 일동 기립(All rise)!

올해도 협량한 당파적 대립으로 예산안 등 정치권에서는 민생현안 처리가 지연되는 사태가 반복됐다. 불행히도 그 과정에서 범죄 발생(올 1분기 기준)은 전년대비 10% 이상 증가했다. 사진 뉴스1·그래픽=박구원기자

올해도 협량한 당파적 대립으로 예산안 등 정치권에서는 민생현안 처리가 지연되는 사태가 반복됐다. 불행히도 그 과정에서 범죄 발생(올 1분기 기준)은 전년대비 10% 이상 증가했다. 사진 뉴스1·그래픽=박구원기자


각자도생 국면에서 2022년 1분기 범죄 피해자 10% 증가
사회지표 악화 속에 새롭게 고개 내미는 우생학의 그림자
인류·국가 위기 속에도 정쟁 일삼은 이들이 사회의 '잉여'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이 발간한 '분기별 범죄동향 리포트'에 따르면, 2022년 1분기에 발생한 전체 범죄는 34만4,622건. 지난해 1분기 31만2,409건에 비해 10.3% 증가했다. 재산범죄는 지난해 1분기 11만4,565건에서 올 1분기 14만3,259건으로 25% 늘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경기침체와 더불어 비대면 문화가 활성화된 후 사이버 사기 범죄가 기승을 부린 것이 그 원인으로 분석됐다.

그래픽=박구원기자

그래픽=박구원기자

최근에는 중범죄도 많이 늘었다. 2022년 2분기 강력범죄 발생건수는 1만890건, 성폭력범죄는 1만216건으로 작년 4분기와 더불어 2년 사이에 가장 높게 나타났다. 2021년 1분기에 비하면 거의 두 배 수준이다. 범죄 양상도 여성과 아동 등 약자를 대상으로 한 범죄가 여전히 기승을 부렸고, 산업재해 역시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진정 기미가 보이지 않는 코로나19처럼 범죄도 계속 변이를 일으키며 진화를 거듭한다. 올해 내가 처리한 형사단독 사건 중에는 보이스피싱과 인터넷 사기, 노인 범죄가 급격히 늘었고 음주운전 역시 줄지 않는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각자도생의 처지에 내몰린 사람들이 자기보다 더 취약한 사람들을 상대로 과감하게 범죄를 저지르는 형국이다. 형사법정에 국한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효용을 다한 채 쓸쓸히 추락하고 있다.

그래픽=박구원기자

그래픽=박구원기자

각종 삶의 지표가 악화하면서 예전의 유령도 다시 등장했다. 바로 우생학이다. 우생학은 19세기 후반 진화론의 득세와 함께 각광받았다. 사회적 약자를 도와주는 것이 적자생존의 법칙에 위배된다는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의 주장은 진화론에 편승해 잘 먹혀들었다.

"나는 광기와 지적 장애, 습관적 범죄행위, 빈궁에 시달리는 족속들의 자유로운 증식을 방지하기 위해 엄격한 강제를 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복지예산의 증액 기사에 달린 악성 댓글이 아니다. 우생학을 창시한 프랜시스 골턴이 1908년 자서전에 쓴 내용이다. 선천적 요인만으로 인간을 분류하고 도태시키려는 우생학과, 타고난 배경과 조건이 천차만별임에도 사람을 능력으로 나누어 달리 취급하는 능력주의가 무엇이 다른지 아둔한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우생학이나 능력주의의 공리주의적 관점은 식량과 물 부족 사태가 오면 인류의 일부를 잉여로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올해의 책으로 뽑힐 정도로 큰 인기를 누린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나오듯 사람이든 동물이든 계층의 사다리로 분류할 수 있다는 인식 자체가 환상이다.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습니다."(김현) "문학은 지드가 콩고에서 탄식했듯이 배고픈 사람에게 빵 하나 주지 못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굶주리는 사람이 숱하게 존재한다는 추문을 퍼트림으로써 이 비정한 세계의 가혹한 현실을 폭로하고 선의의 양심을 부끄럽게 만든다."(김병익) 김현과 김병익은 문학의 쓸모없음이 바로 문학의 쓸모임을 역설한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듯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

시대착오적 이론 같지만 우생학은 끈질기다. 전과자, 소년범, 장애인, 노숙인이나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의 불행이 개인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여기는 한 우생학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한 해가 저무는 이즈음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다. '국가안보와 국민의 생명이 위협받고 경제가 휘청대며, 기후 위기가 일상을 무너뜨리고 자국의 이익만 추구하는 각국도생의 이 엄혹한 상황에서, 회기 내내 정쟁만 일삼는 사람들이 잉여인가, 보잘것없지만 자신이 가진 자원을 전부 투입해 하루하루 삶의 전선에서 존엄하게 버티는 사람들이 잉여인가?' 도대체 누가 누굴 보고 잉여라 부르는가.

박주영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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