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숨은 영웅들] 시민 김순이씨
세입자 장애아 구하다 전신 3도 화상
화상 쇼크 뇌병증 발병, '半혼수' 상태
이웃 "세입자 반찬까지 챙기는 천사"
“도와주세요. 불이 났어요.”
올해 6월 2일 오후 5시 30분 대구 서구의 한 4층짜리 상가주택에서 어린아이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건물 밖에서 손자와 시간을 보내던 집주인 김순이(62)씨는 즉시 양동이에 물을 가득 담아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203호에서 시작된 화재로 2층 복도에는 이미 매캐한 연기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김씨는 복도에서 울고 있는 203호집 둘째 아이(8)를 발견했다. 순간 장애로 거동이 어려운 첫째 A(9)군이 머릿속을 스쳤다. A군이 탈출하지 못했을 거란 생각에 김씨는 지체 없이 화염을 뚫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 A군과 엄마 B씨는 김씨의 남편 양수식(68)씨 도움으로 안전하게 대피한 뒤였다. 구조 대상이 사라지자 김씨는 필사적으로 현관문을 찾았으나, 연기로 뒤덮여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2층 방범창을 뜯어 그를 구조하려던 가족들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소방대원들이 출동한 후에야 창문을 통해 빠져나올 수 있었다. 화마는 그의 전신 60%에 중증 화상을 남겼다.
대구의 한 화상병원에 입원한 김씨는 현재 의사소통과 신체활동을 할 수 없다. 사고 직후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만 해도 간단한 대화 정도는 가능했다. 하지만 매일 전신 화상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고통이 반복되다 보니 8월 ‘쇼크’ 증상과 함께 뇌병증이 발병해 반(半) 혼수상태가 됐다. 양씨는 18일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아내가 사고 후 환각 증상이 생겨 병실 문만 열어도 연기가 들어온다며 고함을 쳤다”고 말했다.
김씨 부부는 불이 난 상가주택 주인이다. 건물 1층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나머지 3개 층은 세를 주고 있다. 세입자 B씨 가족이 203호에 이사 온 지는 5년가량 됐다고 한다. 부부는 화재 전에도 형편이 어려운 B씨 가족을 살뜰히 챙겼다. 몇 달째 밀린 전기세를 대신 내주기도 하고, A군의 장애가 점점 심해져 걷기 어렵게 되자 직접 주민센터를 찾아가 장애인 등록을 도와줬다. 화재 원원이 ‘B씨 가족의 부주의’로 결론 났지만 양씨는 경찰에 선처도 부탁했다.
그는 “사람인 이상 원망하는 마음이 없지 않다”면서도 “아내가 깨어 있다면 저처럼 B씨를 이해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B씨 남편은 “사실상 주인 어르신이 애들을 구해줬다고 생각한다. 죄송하고 감사할 따름”이라며 울먹였다.
김씨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이웃들은 십시일반 위로금을 모아 양씨에게 전달했다. 주민 김동식씨는 “동네에서 김씨를 모르는 이웃이 없을 만큼 좋은 분”이라고 했다. 김씨는 중풍으로 팔 한쪽을 못 쓰는 또 다른 세입자에게도 10년 넘게 반찬을 제공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김씨는 에쓰오일(S-OIL)이 의로운 희생정신을 발휘해 위험에 처한 이웃을 도운 이에게 주는 ‘올해의 시민영웅’에 선정됐다.
명예는 얻었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입원비, 화상치료비 등 지금까지 병원비만 8,000만 원 넘게 들어갔다. 식당도 접어 별다른 수입도 없다. 양씨는 “집을 팔 생각도 하고 있다”고 했다.
남편의 바람은 소박하다. 원래 부부는 올 초 3년만 더 장사하고 여행을 다니면서 남은 생을 즐기기로 약속했다. “크게 바라는 건 없습니다. 아내가 휠체어 탈 수 있을 정도만 돼 같이 여행을 다녔으면 좋겠어요.” 양씨가 3개월째, 24시간 병원에서 숙식하며 아내의 몸을 정성껏 주무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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