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라디오 인터뷰
"기시다 日 총리 야비한 압박... 외교부 적극 나서야"
아르헨티나에 건립 예정이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이 일본 정부의 반대로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까지 나서 외교적 압박을 가할 만큼 소녀상 설치를 둘러싼 일본의 방해가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다.
이나영 정의기억연대(정의연) 이사장은 23일 TBS 라디오에 나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세워질 예정이던 평화의 소녀상이 지난달 25일 제막식을 앞두고 일본 정부의 방해로 설치가 무산된 상황"이라고 밝혔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평화의 소녀상은 아르헨티나 인권단체 '5월 광장 할머니회' 주도로 추진돼 왔다. '5월 광장 할머니회'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지속된 군사정부의 탄압으로 실종된 사람들의 어머니들이 만든 모임으로, 매주 목요일마다 항의 집회를 통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해오고 있다. 평화의 소녀상은 군부독재 시절 수많은 시민을 고문하고 살해했던 옛 해군사관학교 부지에 세워진 '기억의 박물관' 앞에 세워질 예정이었다.
정의연은 소녀상 설치가 무산된 배경에 일본 정부의 전방위적 압박이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이나영 이사장은 "일본 대사가 아르헨티나 정부 측에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했었다. 결정적으로 기시다 총리가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만나 압박을 가한 이후 취소가 됐다"고 전했다.
최근 들어 기시다 내각의 소녀상 저지 움직임은 노골적이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 4월 일본을 방문한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도 "평화의 소녀상이 계속 설치돼 유감"이라며 철거를 위한 협력을 요청했다고 일본 산케이신문 등이 보도한 바 있다. 기시다 총리가 철거를 요청한 건, 2020년 9월 베를린시 미테구 모아비트지역 비르켄가에 세워진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이다.
이나영 이사장은 일본 정부가 국제기구에 대한 외교력을 우위 삼아 아르헨티나 정부 압박에 나섰을 것이라 봤다. 오랜 경제 위기로 고통받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약점을 파고들어, 소녀상을 설치한다면 IMF(국제통화기금)에 아르헨티나 투자를 철회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며 경고했을 것이란 설명이다. 소녀상이 설치될 예정인 '기억의 박물관'이 유네스코에 세계 유산 등재 신청을 한 것도 일본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 요인이란 분석이다. 일본은 유네스코 분담금을 많이 내는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이사장은 "기시다 총리가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서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만나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면 일본이 IMF에 투표권을 행사해서 아르헨티나 투자 계획을 취소하게 만들겠다거나, 유네스코 등재도 못하게 막을 거라는 등 야비한 압박을 했다"고 전했다.
한국 정부에 대해선 "수수방관(을 넘어) 방해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엇보다 외교부에 대한 질타가 컸다. 이 이사장은 "최근 외교부에서 여성 평화 안보라는 국제 콘퍼런스를 열고 여성 인권 문제를 이야기했는데, 정작 자국 여성들의 인권과 역사 부정 행위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게 이해할 수 없다"며 "이 같은 행사가 자신들의 과오를 가리려는 알리바이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고 강하게 성토했다.
예정됐던 제막식은 무산됐지만, 정의연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소녀상 설치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이 이사장은 "아르헨티나 시민사회가 굉장히 강력하다"며 "다른 방식으로 조용히 추진 중"이라고 덧붙였다.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해 '수요집회' 1,000회째인 2011년 12월 14일 서울 종로구 일본 대사관 앞에 처음으로 세워졌다. 이후 뉴욕, 베를린, 시드니 등 전 세계 주요 도시에도 만들어지면서 여성 인권과 평화의 상징물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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