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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병원의 망년회 풍경

입력
2022.12.25 22:00
수정
2022.12.26 22:28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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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12월은 많은 연말 모임으로 일정표가 빽빽하다. 각기 다른 모임에서 같은 날로 송년회를 잡는 일도 있는데, 요즘은 그런 날이 제일 좋다. 이쪽에는 저쪽 핑계를 대고, 저쪽에는 이쪽 핑계를 대고 편하게 퇴근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송년회라는 얌전한 말보다는 망년회라는 말이 더 익숙하다. 요즘은 왜 안 쓰나 알고 보니 일본어의 영향을 받은 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망년회 준비가 어떻게 되고 있냐는 질문에 어떤 젊은이에게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을 겪고 급히 검색한 결과이다. 그래도 망년회라는 말의 한국어 어감이 좋다. 올해도 망했다는 깨끗한 체념을 담은 퇴폐의 어감. 모든 게 무너져서 내년에는 벽돌 2개만 올려도 큰 성취가 될 것 같은 희망의 전주곡.

가족, 친구 모임에 더하여 병원도 하나의 사회여서 여기에도 직종별, 부서별로 여러 종류의 송년회가 있다. 진료과의 전체 송년회의 경우 의사직, 간호직 포함하여 많은 인원이 모인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다들 마스크를 끼고 일을 하다 보니 현장에서 얼굴을 봐도 서로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 마스크를 벗으면 더 어색해지는 세상이다.

이렇게 규모가 큰 송년회의 경우, 앞에는 어린 사회자와 장기 자랑 무대가 마련된다. 스타 탄생의 장이 되는 아마추어들의 꿈의 무대. 특기가 특출나지 않아도, 하부 조직의 내부 결속과 대외적인 존재감 과시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심청의 마음을 가진 재능 기부꾼도 있다. 어쨌거나 무대에 오르는 사람들은 최소한의 '끼'만으로도 복된 자들이다. 건물마다 노래방이 있는 세계적인 노래강국이어서 그런지, 일로 만난 사이에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반전 매력을 가진 사람들이 주위에 차고 넘친다. 어떻게 저런 몸놀림과 노래 실력을 숨기고 살고 있었단 말인가? 일에 파묻혀 지내던 어떤 '신인'들의 찜쪄 먹는 무대를 접하고는 괜히 찾아가서 연예인을 만나듯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무협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는 발차기 액션이 하고 싶듯이, 멋진 무대를 보고 나면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

필자 같은 보통 사람들은 무대를 보고 놀라고 흥겨워 손뼉을 칠 뿐이다. 무대를 즐기는 자들을 그저 동경하는 자. 무대는 연기자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객석에서 즐겨주는 사람들도 중요한 사람들이다. 객석에 앉아 있는 나는 혹시 누군가가 등 떠밀어 앞으로 나가게 되는 돌발적인 불상사가 생길지 늘 긴장한다. 요즘 유행하는 노래 한두 곡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하는데, 나 같은 사람은 어차피 안 시킬 것을 준비하면 뭐 하겠나 하는 마음이 든다. 행사의 마지막에는 경품 추첨이 있다. 1등이 요즘 유행하는 헤어드라이어라고 한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머리가 없어지는데 저게 다 무슨 소용인가도 싶기도 하다. 물론 경품 추첨은 3등도 된 적이 없다.

건배사나 축사는 이뤄낼 수 없어 지킬 수 없는 말들로 꾸며진다. 조직에 대한 사랑은 건배로 약속되고 말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조직을 만드는 일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직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기보다는 굳건한 각자에게 손뼉을 쳐주는 일이 먼저다. 술잔을 비우고 나오면서 오늘 잘 들은 노래 하나를 흥얼거려본다. 언제쯤이 되어야 무대에 나가볼 용기가 생길까?

"피고 지는 마음을 알아요. 다시 돌아올 그날도···."


오흥권 분당서울대병원 대장암센터 교수·'의과대학 인문학 수업' '타임 아웃'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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