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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제사 터가 이곳일까

입력
2022.12.24 11:0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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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기동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27> 부천 고강동 청동기시대마을 적석환구(積石環溝)

하늘에서 본 부천 청용산 꼭대기의 적석환구(돌무지가 있는 동그란 구덩이) 유구.

하늘에서 본 부천 청용산 꼭대기의 적석환구(돌무지가 있는 동그란 구덩이) 유구.

우리는 언제부터 제사를 지내게 되었을까? 현생인류는 자연에 대한 외경이나 기원을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유럽,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보르네오섬의 동굴 벽화들은 이미 4만년 전 무렵 인류가 한자리에 모여 죽인 동물을 추모하고 앞으로의 번성을 빌었던 흔적일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아직 구석기시대의 것은 없지만, 신석기나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울주 반구대 유적이 그러한 의례행위를 보여준다.

그러면 우리 역사에서는 언제 특별한 장소를 만들어 희생을 바치고 자연과 하늘 그리고 신에 감사의 제사를 올렸을까? 이 질문에 답하는 실마리가 되는 유적이 바로 부천 고강동-작동의 청용산 꼭대기에 남아 있는 청동기시대 마을의 적석환구(積石環溝)이다. 아마 하루에도 수십만 명이 경인고속도로를 지나다니지만 절개단면이 드러난 곳에 이런 유적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삐죽이 튀어나온 돌도끼

고강동 제1호 주거지. 등산객이 발견한 돌도끼가 나온 유적이다. 중앙 기둥열로 보아 맛배지붕의 집이다.

고강동 제1호 주거지. 등산객이 발견한 돌도끼가 나온 유적이다. 중앙 기둥열로 보아 맛배지붕의 집이다.

한여름, 복더위 속에 급하게 찾아간 고강동 야산의 등산로. 물길을 파서 깊은 홈이 파인 곳에 새까만 흙이 틈새로 보였다. 바로 그곳이 고강동 제1호 주거지의 바닥면이 삐죽이 드러난 현장이다. ‘아! 고래 등이네!’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흙이 까만 것은 그 주거지에 화재가 나 건물 모두가 타고 남은 숯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이 조그만 틈새가 생겨나게 된 것은 폭우로 빗물이 등산로를 흐르다 낮은 곳에서 넘쳐 조그만 폭포같이 흐르면서 땅을 깎아서다. 그때 주거지에 있던 돌도끼도 흘러내렸고 등산객이 발견해 경기도에 신고한 것이다. 당시 신고를 받고 현장에 동행했던 송성근 경기도 학예사와 그 검은 층을 발견하는 순간 환한 웃음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 청동기시대 집자리구나!’ 그리고 ‘마을이 있겠구나!’ 청동기시대에 이런 능선을 따라 집자리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간 7차례 발굴에서 20여 기의 청동기시대 네모난 집자리들이 능선을 따라 발굴되었다.

하늘에서 본 고강동-작동 유적. 청용산을 자르고 지나가는 경인고속도로(좌우 방향)와 수주로가 십자 모양으로 교차한다.

하늘에서 본 고강동-작동 유적. 청용산을 자르고 지나가는 경인고속도로(좌우 방향)와 수주로가 십자 모양으로 교차한다.

인천 방향으로 신월 IC를 지나 조금 가면 엄청나게 높은 산경사면이 나타나는데 바로 고강동-작동 유적이 위치한 곳이다. 김포공항에서 사당동 방향으로 남부순환도로를 타고 신월 IC 직전에 우회전하면 부천의 수주로가 나오는데 수주로가 경인고속도로와 교차하는 지점 왼쪽에 집들 너머로 구릉성 산지가 보인다. 지금은 수주도서관-문학관과 함께 고강동유적교육장이 있다.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1898~1961)는 이 동네 출신 시인으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로 시작하는 ‘논개’라는 시로 유명하고,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한 애국자 집안으로 부천시민이 자랑하는 인물이다.

청용산 꼭대기의 미스터리 유적

청용산 꼭대기 부근에서 보는 부천-김포-서울의 파노라마 풍경.

청용산 꼭대기 부근에서 보는 부천-김포-서울의 파노라마 풍경.

청용산은 표고(標高)가 100m가 채 되지 않는데, 롯데 타워가 555m이니 높이가 그 5분의 1도 안 되는 나지막한 산이다. 고강동의 유적 입구에서 걸어서 경인고속도로 위를 가로지르는 보행교를 지나 작동 쪽의 청용산 꼭대기로 계단을 오르니 경사가 급해 순간적으로 힘이 들기는 하다. 낮은 편이지만 앞이 트여 산 정상에 서면 동쪽으로 한강이 김포반도를 돌아가는 모습과 고양의 아파트군이 보이고, 과거에는 벌판이었을 김포공항이 멀리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경치가 좋아선지 올라가는 길에 만난 한 중년 여인은 한참 동안 이곳에서 아파트로 빼곡한 도시의 속세 풍경을 감상하고 일어섰다.

이 청용산 꼭대기에 네모난 돌무지가 있고 이것을 삥 둘러싼 반지 모양의 구덩이가 발견되었다. 원 모양으로 직경 20m 정도의 도랑이 돌아가는데 서쪽에는 도랑이 끊어져 있다. 그리고 김포공항을 바라보는 쪽에는 바깥쪽으로 호형(활 모양)의 도랑이 하나 더 있다. 그 일대에 시커멓게 탄 흔적들이 남아 있었고 제기(祭器) 모양의 두형(豆形)토기 바닥에는 무엇인지 새까만 것들이 누룽지처럼 눌어붙어 있다. 분명히 이 자리에서 무슨 음식을 조리한 듯 보인다. 이런 모양의 유적은 당시에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다. 이곳에서 무엇을 하였던 것일까?

고강동 적석환구 유구. 중앙에 적석(돌무지)이 있고 이중으로 된 활 모형의 구가 보인다. 아래는 평면도 및 단면도.

고강동 적석환구 유구. 중앙에 적석(돌무지)이 있고 이중으로 된 활 모형의 구가 보인다. 아래는 평면도 및 단면도.

환구, 염원의 공간인가?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원형의 구덩이를 파서 내부에 구역을 만든 건 분명히 의례적인 이유일 것으로 짐작한다. 고강동-작동의 청동기시대 마을에서 다른 지점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구역으로 표시한 곳이다. 고고학자들은 이런 공간은 생활공간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신성한 공간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고강동-작동에서 이러한 유구가 발견되고 난 후 연속해서 전국의 여러 청동기나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에서 비슷한 구조가 발견되었다. 서울 경기 지역만 해도 안성의 반제리, 화성의 쌍송리와 정문리, 평택의 용이동, 구리의 토평동, 인천 당하동 등의 유적들이다. 이 유적들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이 시대에 분명 마을의 공통적인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강동1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석기들. 반달칼, 한상석부(원형날돌도끼), 돌도끼, 방추차, 화살촉, 돌칼자루 편, 작물수확도구와 사냥도구가 골고루 구성되어 있다.

고강동1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석기들. 반달칼, 한상석부(원형날돌도끼), 돌도끼, 방추차, 화살촉, 돌칼자루 편, 작물수확도구와 사냥도구가 골고루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곳이 어떠한 기능을 하였을까라는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왜냐면 특별한 유물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고강동-작동 유적의 경우에는 불을 사용한 흔적이 있고 의례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토기들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자들은 마을 내에 공간을 구분했다는 것은 그 내부를 신성하게 생각했을 것이고 그 속은 분명 제의(祭儀)가 이루어지는 곳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제사를 지냈다는 뜻이다. 누구에게 무엇을 위해서 기도를 드린 것일까?

왼쪽은 주거지에서 발견된 입술부 원형점토대토기로 시기는 청동기시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오른쪽은 다리가 달린 두형토기 그릇으로 내부에 탄화물이 붙어 있다.

왼쪽은 주거지에서 발견된 입술부 원형점토대토기로 시기는 청동기시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오른쪽은 다리가 달린 두형토기 그릇으로 내부에 탄화물이 붙어 있다.

동이전의 별읍의 원형인가?

평지를 농토로 활용하려 산중에 집을 짓고 사는 시대에 농사일은 먹고사는 일이니 가장 중요하다. 이를 위해 봄과 가을에 신에 기도드리고 풍요를 기원하였을 것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조선 세종조에도 굶어죽는 사람이 많아서 자연 속에서 음식 구하는 법을 '구황촬요(救荒撮要)'라는 책으로 만들었던 것을 기억하면 이보다 훨씬 오래된 고대인의 삶이 때로는 훨씬 어려웠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 하늘을 바라보게 되는 법이다. 중국의 정사 삼국지 위지동이전(東夷傳)을 보면 고대 동이의 여러 나라에는 제천의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에도 삼한에 제천의식이 있었고 이러한 의식에는 집단의 크기에 따라서 대소의 구분이 있었다고도 전한다. 이 모두 농업사회의 풍요기원 의식이다.

적석환구 위에서 임근우 교수가 하늘을 위한 제사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 현장에서 진행한 대중고고학적 이벤트다.

적석환구 위에서 임근우 교수가 하늘을 위한 제사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 현장에서 진행한 대중고고학적 이벤트다.

고강동의 적석이나 환구가 마을 내 별도의 특별한 공간으로서 제사를 지냈던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나오는 별읍(別邑)일 가능성이 있다. 별읍에는 큰 나무를 세우고 나무 위에 방울과 북을 걸고 귀신에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지금은 북이나 방울은 사라지고 없지만 청용산 꼭대기의 돌무지들도 그러한 목적으로 그곳에 놓인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나라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에서 가끔씩 보이는 것이 바로 복골(卜骨)이다. 소의 견갑골, 넓적한 어깻쭉지 뼈를 불에 달구어 깨어지는 선을 보고 점을 쳤던 것이 바로 복골이다. 환구유구의 북쪽 편에 넓게 분포하는 불로 지져진 흙이나 검게 남은 탄화 성분은 그러한 의식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제기 모양으로 생긴, 굽다리가 높은 토기가 출토된 것을 미루어 보아도 그곳에 불을 사용하고 탄화된 음식물이 남아 있는 것이 심상치 않은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복골점을 치기 이전에 동물 희생(犧牲)도 행해졌을 가능성이 엿보이는 고고학적인 단서인 것이다. 물론 유적에 복골은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보다 약간 늦은 시기에 남해안의 군곡리나 늑도의 패총 유적에서는 복골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오래된 전통일 것이다. 지금 청용산에 오르면 아쉽게도 꼭대기의 큼직한 고목이 맞이할 뿐 적석환구 유적은 볼 수가 없다. 유적 보존을 위해서 흙으로 덮어 두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청용산 꼭대기에 적석환구 유구는 땅속에 남아 있다. 아래는 고강동공원에 전시된 적석환구 모형.

오늘날 청용산 꼭대기에 적석환구 유구는 땅속에 남아 있다. 아래는 고강동공원에 전시된 적석환구 모형.

다리를 건너며 느끼는 허탈함

고강동에서 작동으로 청용산 정상을 가려면 경인고속도로 위의 다리를 건너게 된다. 오래전 고속도로를 내면서 우리 고대사의 중요한 현장인 유적이 무참하게 잘려나간 마을 유적 파괴 현장을 건너고 있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 우리 삶의 형편이 나아졌음에도 잘려진 유적을 이어주는 것은 우리의 관심 밖이어서 안타깝다. 고강동-작동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은 세세하게 기록되지 않은 우리 고대인의 삶과 정신세계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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