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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이 적이 아닌 서로의 동료가 되려면?

입력
2022.12.18 19: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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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88년생 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와 93년생 곽민해 뉴웨이즈 매니저가 2030의 시선으로 한국정치, 한국사회를 이야기합니다.

화물연대(왼쪽 사진·연합뉴스)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뉴스1)의 행동에 대해 갈등 상황만을 부각하고 일방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문제의 입체적 원인을 조명하려는 정부 대응이 아쉽다.

화물연대(왼쪽 사진·연합뉴스)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뉴스1)의 행동에 대해 갈등 상황만을 부각하고 일방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문제의 입체적 원인을 조명하려는 정부 대응이 아쉽다.


갈등 현안의 중재에 소홀한 정부의 아쉬운 대응
혼란 수습과 함께 갈등 원인도 입체적 조명해야
시민 서로가 권리를 존중하는 소통이 우선돼야

고등학교 때 어떻게 하면 지각을 줄일지를 놓고 학급 회의가 열렸다. 선생님이 제시하는 방법은 벌금이었다. 하지만 집이 너무 멀고 교통편이 불편하면 똑같이 늦지 마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한편 8시까지 오지 않을 시 지각이라는 말이 7시 59분 59초까지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말인지, 8시 00분 59초까지는 괜찮은지를 두고도 의견이 나뉜다.

집에서도 회사서도 갈등할 이유는 많다. 사무실 쓰레기를 누군가만 비우고 있다면 문제다. 갈등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 어떤가. '얼른 이 시간이 끝나면 좋겠다'는 마음이 굴뚝 같다. 그럼에도 모두 자기 생각을 꺼내다 보면 '아, 그런 줄은 몰랐어요'라는 이해의 순간에 도달하고 우리 안의 룰이 정해진다.

누군가 내리 꽂은 규칙과, 과정에 참여한 이들이 주관식 답변을 열어 두고 대화하며 좁힌 결정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모두에게 동료로서 경험이 학습되기 때문이다. 다음번에 내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이야기를 꺼내게 되어도 동등한 주체로 참여할 수 있다는 안전감이 자리한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시민과 시민이 동료가 되는 과정이 없다시피 하다. 그중 한 장면은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정부 결정이다. 초과 근로와 과적, 과속으로 인한 사고를 막기 위해 최소 임금을 보장하라며 시작된 파업은 빠르게 불법으로 규정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사상 최초 업무개시명령을 내렸고 언론은 파업이 경제에 미친 손해를 연일 대서특필했다. 또 다른 장면은 10·29 참사에 대한 정부 대응이다. 원인을 다룰 틈도 없이 바로 애도 기간을 지정했다. 시스템 부재를 지적하는 말은 '참사를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며 차단했다. 현장 지휘자가 문책을 당했고 진상 규명에 대한 유가족 요구는 공감대를 얻을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마지막 장면은 전장연 시위를 무정차 통과하기로 한 결정이다. 서울시는 대통령실 문의에 따른 조치라고 밝혔다. 전장연은 장애인 권리 예산 확보를 위한 투쟁이라고 목표점을 밝혔지만, 정부는 시위 방식만 지켜보다 전장연을 논의에서 열외로 만들어 버렸다.

윤석열 정부는 갈등의 속성을 규정하고 다른 시민과 분리하는 데 정치의 힘을 쓴다. 갈등 사이로 들어가 대화를 열지 않는다. 정부가 모든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회 혼란을 수습하면서도 문제의 원인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방법은 없는지 묻는 것이다.

화물연대를 북핵에 비유하거나 형사 처벌을 강조하며 불법화하는 데만 집중하지 않고 안전운임제를 둘러싼 이해 관계와 입장 차이를 대중에게 알리거나 안전운임제에 대한 정부의 우려를 설득할 수도 있었다. 전장연 시위 방식을 문제 삼고 고립시키는 대신 장애인 권리 예산의 내용과 쟁점을 알릴 수도, 현실적인 타협점을 만드는 노력을 보여줄 수도 있었다.

'경제가 얼마나 안 좋은데 파업이야?', '다 좋은데 출근길에는 나오지 마', '할로윈 때 놀러 나간 사람들이 문제 아냐?' 지금 남은 건 서로를 이해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적이 되는 시민이다. 우리는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화물차 기사의 노동 환경과 장애인 권리 예산의 내용, 참사의 원인에 대해서 얼마나 더 알았나? 다시 같은 문제나 사고가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나? 무엇을 새롭게 이해하고 약속하게 되었나?

시민이 동료가 된다는 건 서로가 서로의 권리를 약속하는 장면을 확인하고 지켜주는 합리적인 증인이 되는 일이다. 다른 시민을 적으로 규정하고 대화를 닫는 방식이 계속되면 제자리를 지키는 데만 급급해진다. 그러다 만약 오늘 내가 누리고 있는 편의가 사라진다면 나 역시도 납작한 시민이 되지 않을까? 이런 질문을 남기는 걸 권력이 아닌 정치라 부를 수 있을까?

곽민해 뉴웨이즈 커뮤니케이션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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