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 EU와 회담서 우크라 전쟁 등 갈등에 '중립' 입장
G20 이후 아세안 세력화에 속도...경제 문제서도 '목소리 내기'
어느 한쪽 편 들었다간 손해...'약소국 모임'의 현실적 고민도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이 외교무대에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키우기 시작했다. 강대국 간 갈등이 극에 달한 국제 사회에서, 아세안 세력화와 정치·외교적 중립으로 지역 이익을 우선 챙기겠다는 것이다.
아세안의 변화된 행보를 놓고, '약소국 모임'의 현실적 고민이 반영됐다는 해석도 나온다. 어느 한쪽 편을 일방적으로 들었다가 반대편 세력으로부터 보복을 당할 수 있으니, 차라리 철저한 중립으로 '몸값 높이기'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우크라 전쟁·대만 갈등? 아세안은 적극 개입 안 한다
15일 홍콩 일간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 현지매체에 따르면, 아세안과 유럽연합(EU)은 전날(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정상회의가 끝난 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은 "'대부분'의 아세안 회원국은 전쟁을 강력히 규탄하며, 그것이 엄청난 인간의 고통을 야기하고 세계 경제의 취약성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고 명시했다. 다만 "(아세안 회원국 내에서) 상황과 제재에 대한 다른 견해와 평가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서방이 원하는 '절대적 지지'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번 성명은 지난달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개최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공동선언과 대동소이하다. EU가 "우크라이나 주권, 정치적 독립, 영토 보전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문구 추가를 강력히 요청했으나 아세안이 이를 거절했다. 아세안은 또 당시 대만을 놓고 펼쳐진 미중 갈등 사태를 공동선언에 언급하는 것 자체도 거부했다. 과거 강대국의 눈치만 보며 공동성명에 사인만 하던 아세안이 아님을 대외적으로 공표한 셈이다.
아세안의 의지는 "더 이상 아세안은 강대국 경쟁의 볼모가 아니다"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의 발언에서 뚜렷이 확인된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정상회의 직후 "아세안은 특정 강대국과 제휴하고 선택하는 것을 거부한다"며 "이제 아시아-태평양(아태) 지역 미래는 아태 국가들이 결정하는 시대가 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투자·차관보다 FTA 원한다" 경제영역에서도 '목소리 내기'
아세안의 변화된 태도는 경제 영역에서도 이어졌다. 아세안은 EU가 역내 에너지 인프라 발전을 위해 총 100억 유로(13조8,000억 원)의 투자와 차관 제공을 약속하자, 역으로 지역 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강하게 요구했다.
실제로 올해 아세안 의장국인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는 회의 이후 "유럽이 아세안보다 발전한 건 사실이지만 아세안은 이제 유럽의 도움만 기다리고 원조만 받는 곳이 아니다"며 "우린 두 지역의 경제 상호보완성에 기초한 무역 협상을 선호한다"고 강조했다. 베트남·싱가포르와 개별 FTA를 맺은 EU에 "특정국이 아닌 지역 전체와 교류하자"고 못 박은 것이다.
아세안의 이런 변화된 행보를 놓고, 강대국 간 경쟁 구도에서 어느 한쪽 편을 일방적으로 들 수 없는 현실적 고민이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세안은 그동안 비교적 서방과 가까웠으나 중국의 급성장과 이에 따른 중국의 지역 영향력 증대, 또 러시아의 접근 노력 등으로 서방만 바라볼 수 없는 상황이다. 서방을 무조건 지지했다가 중국, 러시아 등과 관계가 틀어지면 오히려 손해가 더 클 수 있다는 것이다.
아세안의 세력화 움직임에도 국제사회에서 이들의 위치가 급변하긴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동남아 외교가 관계자는 "G20 이후 아세안이 중립을 강하게 표방하지만 이미 강대국에 예속된 경제·사회구조를 고려할 때 완전한 독자 세력화까진 시간이 꽤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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