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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흥망성쇠로 본 인류문명사

입력
2022.12.15 17:20
수정
2022.12.15 19:18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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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리걸리즘' 프로젝트 결과물

법, 문명의 지도·퍼난다 피리 지음·이영호 옮김·아르테 발행·640쪽·4만 원

법, 문명의 지도·퍼난다 피리 지음·이영호 옮김·아르테 발행·640쪽·4만 원

1497년, 포르투갈 탐험가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 캘리컷 해안에 정박했을 때다. 당시 동양의 무역망에 합류하기 위해 항로 개척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그는 곡물, 설탕, 향신료, 커피 등 아시아에서 온 진귀한 물품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정작 마음을 빼앗긴 건 따로 있었다. 상업과 기술이 광범위하게 발전한 이슬람과 중국, 인도에서 온 법률이었다. 유럽인이 지역 관습에 불과했던 자신들의 법에 비해 훨씬 다채롭고 정교한 아시아의 법체계에 눈을 뜬 순간이다.

퍼난다 피리 옥스퍼드대 법인류학과 교수가 쓴 '법, 문명의 지도'는 세계 질서를 만든 4,000년 법의 역사를 다룬다. 흥미로운 것은 로마법을 통해 문명사를 살피는 기존 연구 관습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책은 법학·인류학·역사학·동양학 등의 연구자들이 법 체계에 대한 사례 연구를 수행한 '옥스퍼드 리걸리즘'(Oxford Legalism) 프로젝트를 응축한 결과물이다. 다양한 전공 관점에서 법 역사를 분석한 만큼 시간적, 공간적 범위가 넓고 다양하다.

책에는 엉뚱하다고 여겨지는 서약에서부터 뉴욕 다이아몬드 상인들의 불문율, 마피아 조직의 규칙, 티베트고원 라다크의 관습, 교회법과 대별되는 세속법까지 거의 모든 법 체계가 등장한다. 다양한 사회와 문화 속에 다원적으로 존재해온 법은 때로 위대한 문명을 모방했고, 권위 있는 체제의 질서를 재현하려 했으며, 우주론적 이상을 반영하거나 문명 세계의 비전을 창조했다.

장대한 법의 문명사를 톺아본 저자는 '법은 권력의 도구이지만 종종 권력에 저항하는 수단'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법이라는 수단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을) 피할 수 없는 것도, 무찌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승리는 우리에게 있다."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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