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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졌잘싸는 다르다

입력
2022.12.12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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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만의 월드컵 16강 진출을 이룬 한국 축구대표팀 '캡틴' 손흥민이 7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며 마중 나온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12년 만의 월드컵 16강 진출을 이룬 한국 축구대표팀 '캡틴' 손흥민이 7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며 마중 나온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돌이켜 보면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는 한국인의 멘털리티를 바꾸는 일대 전환점이었다. 오늘날 세계를 주름잡는 K콘텐츠의 문화적 기원을 거슬러 가면, 2002년 그해 뜨거웠던 여름과 그보다 더 뜨거웠던 거리 응원과 승리의 열광이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 전까지 우리가 목도해야 했던 것은 넘을 수 없는 장벽, 어찌할 수 없는 한계였다. 4년마다 돌아오는 월드컵에서 선수들은 죽을 힘을 다해 투지를 불살랐지만, 잘한 경기라도 늘 한 끗이 모자랐다. “그 골만 들어갔더라면, 그 골만 막았더라면”이라고 안타까워하며 ‘졌지만 잘 싸웠다’고 자족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안 된다’는 뿌리 깊은 패배 의식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그 당시의 ‘졌잘싸’는 열등감을 감추는 자기 위안의 정신승리였다. 이 기만을 벗어나려 해도 냉소의 늪에 빠지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16강은커녕 1승도 거두지 못한 현실 앞에서 어떤 의식으로 무장하더라도 우리는 주인이 될 수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노예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출구 없는 멘털리티의 미로를 깨버린 게 2002년이었다. 1승을 넘어 4강까지 질주한 히딩크호는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숙원만 푼 게 아니라, 근대 이후 한국인의 멘털리티 밑바닥에 도사렸던 서구에 대한 선망과 질시, 패배감 등을 시원하게 뚫어낸 폭주 기관차였다. 모두가 16강에 감격할 때 “나는 아직 배고프다”는 히딩크 감독의 인터뷰는 한국인에게 이제 더 이상 절대적 한계 같은 것은 없다는 죽비나 마찬가지였다.

따지고 보면 그때 우리에겐 1승과 16강이란 현실의 결과가 중요했다. 국내 리그를 희생시키고 장기간 합숙 훈련하는 비정상적 방법이 동원됐지만 과정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여하튼 어찌할 수 없는 장벽을 돌파하기 위해 결과로써의 발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20년 뒤 2022년의 월드컵은 지금 젊은 세대에게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2002년 이후 박지성 김연아 손흥민 등 세계적 선수뿐만 아니라 방탄소년단(BTS) 블랙핑크 등 슈퍼스타를 배출했고, 국제 무대 여러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에 올랐다. 더 이상 외국인들에게 주눅들 이유도 없고 “두 유 노(do you know) 김치” 따위의 유치한 질문을 할 필요도 없는 세대다. 이들에게 이번 월드컵이 큰 감동을 안겨줬다면 우리 때와는 분명 다른 종류의 희열일 터다.

월드컵 이후 Z세대에서 유행어가 된 ‘알빠임'(네가 강하다 해도 내가 알 바 아니다는 뜻)과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에서 느껴지는 것은 콤플렉스 없는 어떤 꿋꿋함이다. 애당초 자격지심이 없는 젊은 세대에겐 남이 강하든 말든, 신경 쓸 필요 없이 우리만 잘하면 그만인 것이다. 남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하지 않는 그 자세, 그게 바로 주인의식이 아니던가. 짐작하건대 선수들이 그 정신을 유감 없이 보여줬고, 그에 걸맞은 실력을 보였으며, 그 실력대로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환호했을 터다. 그러므로 선수들이 브라질전에서 크게 패했다 하더라도 미안할 필요가 없었다. 졌지만 잘 싸웠기 때문이다. 지금의 “졌잘싸”가 자기 위안이 아니라, 당당한 도전에 대한 긍정으로 들리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송용창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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