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소재문화재재단 책 '우리 품에 돌아온 문화재'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4년. ‘서예’라는 단어를 만든 서예가 손재형(1903~1981)은 ‘추사 김정희에 미쳐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일본인 연구자 후지쓰카 지카시를 찾아 도쿄로 건너갔다. 노령으로 병석에 누워 있던 후지쓰카를 아침마다 찾아가 아무 말 없이 인사하고 되돌아오는 일을 반복했다. 하루에도 공습경보가 수차례 울리는 상황, 목숨을 내놓은 길이었다.
어느 날 후지쓰카는 말한다. “내 눈을 감기 전에는 내놓을 수 없소. 하지만 세상을 뜰 때는 아들에게 유언해 그대 앞으로 보내 줄 터이니 이제 그만 돌아가시오.” 손 선생은 대답 없이 물러난 후 문안 인사를 계속했다. 마침내 마음을 돌린 후지쓰카가 아들을 불러 한 그림을 건네주며 말한다. “부디 잘 지켜 주시오.” 그가 건네받은 그림은 조선시대 문인화의 최고 걸작,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다.
'세한도'와 같이 해외를 떠도는 문화재가 우리 품에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하는 단체가 있다.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다. 외규장각 의궤 297책, 어재연 장군 수(帥)자기, 효명 세자빈 책봉 죽책 등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관여한 19개 문화재 반환의 뒷이야기를 담은 책 ‘우리 품에 돌아온 문화재’가 나왔다. 재단 소속 강임산 지원활용 부장은 통화에서 “오랜 노력 끝에 돌아온 문화재의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를 더 알리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세계 각지에 흩어진 우리 문화재는 약 21만 점으로 추정된다. 19세기 후반 열강의 침탈, 20세기 초 일제 식민통치를 겪는 동안 수많은 문화재가 약탈되거나 도난당했다. 강 부장은 “불법·부당하게 반출된 문화재는 무조건 환수하기 위해 노력한다”며 “정당하게 해외에 나간 것이라도 가치가 큰 문화재는 기증받거나 매입해서 우리 품에 돌아올 수 있도록 애쓰고 있다”고 했다.
가령 조선시대 문신 이선제(1390~1453) 묘지 반환은 '선의로 인한 기증'의 좋은 예다. 묘지는 우리나라 밀수꾼이 빼돌린 걸 일본 고미술 수집가가 불법 반출품인지 모르고 취득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접촉하자 수집가는 “묘지를 미술품으로 아껴왔지만, 묘지를 잃은 가문의 마음도 헤아릴 수 있다”며 반환 의지를 표했고, “한일 두 나라의 우의를 키우는 데 보탬이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며 무상 기증했다. 조선 전기 묘지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이선제 묘지는 국가 보물로 지정됐다.
병인양요 때 약탈당했다가 한국과 프랑스 정부의 20년 걸친 협상 끝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미국 해병대 장교가 불법 반출했다가 미국 국토안보수사국(HIS)에 포착돼 버락 오바마 대통령 방한과 함께 돌아온 ‘대한제국 옥쇄’ 등의 얘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임진왜란 승리를 기념하는 비석인 ‘북관대첩비’는 일본 야스쿠니 신사 전리품으로 전락했다가 남북한 협력으로 원래 자리인 함경도 길주 땅으로 돌아갔다.
해외를 떠도는 문화재를 되찾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정보 자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강 부장은 “크리스티나 소더비 등 해외 경매 사이트에 어떤 문화재가 나왔는지 매주 모니터링을 한다”고 했다. 문화재 불법 반출을 금지한 유네스코 조약이 있지만, 권고 수준일 뿐 강제할 실효성이 없어 치밀한 설득 전략은 물론 때론 정부 차원의 외교적 협상까지 필요하다. 강 부장은 "해외 모든 문화재가 돌아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역사의 빈 연결고리를 채워주는 물품은 고국 품에 돌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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