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교황’, ‘미세스 다웃파이어’, ‘사랑의 불시착’ 등 올해 흥행작 도맡아
무대디자이너 이엄지
이엄지는 최근 몇 년간 공연판에서 가장 잘나가는 무대디자이너로 꼽힌다. 연극 ‘두 교황’,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 ‘사랑의 불시착’ 등 올해 흥행 작품의 무대가 다 그의 작품이다. 미국 유학에서 조각과 설치미술을 공부했고, 이를 바탕으로 무대미술에 뛰어든 지 10년째다. 극장의 구조상 평면적이기 십상인 무대를 설치미술을 기본으로 극의 주제를 살려 입체적으로 만들어낸다. 작품마다 카멜레온처럼 변화무쌍하게 최적의 콘셉트를 찾고, 장면마다 극적 의미를 표현하는 무대로 꾸민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형예술에서 무대미술로 진로를 바꾼 과정이 궁금하다.
“한예종 조형예술과에 다니다 미국 유학을 갔다. 멜릴랜드예술대학(MICA)에서 조각을 전공했는데, 작품을 설치하고 표현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관객이 공간에 들어왔을 때 어떻게 작품을 만나게 될 것인가를 고려하며 작업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간에 관심과 이해가 높아졌다. 내가 주제부터 정하고 텍스트가 있는 무대에서 다양한 시점과 관점으로 작업하면서 경험이 쌓였다. 설치미술과 무대디자인 모두 시작점이 ‘공간’이기에 자연스럽게 확장된 셈이다.”
=MICA에서의 학교생활과 수업은 어땠나.
“실기 못지않게 이론과 교양 수업이 많아 좋았다. 영어가 능통하지 못해 애를 먹었지만, 그래서 더 독하게 공부했다. 당시 교수들이 붙여준 내 별명이 ‘워리어(warior)’였다. 교수들이 내 작업을 혹독하게 평가하고 지적하면,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오는 ‘준비된 전사’라는 의미의 칭찬이었다. ‘몸집 작은 저 동양아이가 설마 할 수 있겠어?’라는 의문을 ‘저 아인 기대하면 그 이상의 것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어’라는 생각으로 바꾸는 그 과정이 힘들지만 참 즐거웠다.”
=10년간의 작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인가.
“2019년에 올렸던 ‘시티 오브 엔젤’이다. 디자인 콘셉트나 무대를 풀어낸 방식 등에서 다름과 공감의 균형을 맞춘 작품이다. 유학에서 돌아와 처음 작업할 때 학교에서 배웠던 방식과 한국의 디자인이 달라 힘이 들었다. 미국에서 하던 방식으로 무대를 푸니 너무 난해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한국 공연 디자인이 뻔하다는 게 아니라 관객이 선호하는 스타일과 무대를 풀어가는 방식이 서로 달랐던 거다. 그런 상황에서 내 스타일을 잡아가며 작업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만난 작품이다. 대단히 미국적인 작품이라 그동안의 패널 방식을 좀 더 콘셉트 적으로 풀어가자며 의욕적으로 진행했다. 새롭게 시도한 미장센으로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낳았다고 생각한다.”
=현장에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뭔가.
“미국에서는 수평적으로 일하는 데 반해 우리는 장유유서 정서가 있다. 나는 연출과 가장 먼저 만나 일을 시작하고 무대 막이 오를 때까지 작업을 주도해야 한다. 하지만 나어린 여자라는 시선에 하고 싶은 말과 표현방식을 주저하게 되더라. 그러다 보니 내가 그렸던 방향에서 벗어난 무대가 나오기 일쑤였다. 처음엔 그게 힘들었고, 결국 작품을 위해 스스로 극복해야 했다. 사실, 처음 작업에 나섰던 10년 전에는 제작하는 분들이 나에게 “아가씨는 저기 가서 천이나 만지라”는 분위기였다. 그분들을 실력과 결과로 설득하고, 소주도 주고받으며 적응했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고 역할을 존중해주니 참 많이 바뀌었다.”
=무대디자인 영감은 어디서 얻나, 롤 모델이 있나.
“설치미술 작품에서 영감을 얻는다. 에스 데블린(Es Devlin)의 작품을 자주 찾아보고 있다. 공연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아티스트이다. 데이비드 로크웰(David Rockwell)David Rockwell)도 좋아한다. 무대와 인테리어, 오브제 상품 디자인까지 다양하게 작업하면서 계속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더라. 이렇게 여러 분야로 작업을 펼치는 아티스트가 되는 것이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이다. 변화를 목표로 방향을 잡고 나니 요즘은 매일매일 의욕이 넘친다.”
=지금 작업하고 있는 작품과 계획은.
“‘물랑루즈’ 무대를 작업 중이다. 이 공연에는 수퍼바이저로 참여하고 있다. 이밖에도 내년을 위해 디자인 작업을 시작했는데, 아직은 공개하기가 어렵다. 정말 시작단계이기 때문에 머릿속의 구상을 언어로 옮길 수가 없다. 올해 8, 9월에 여러 작품을 올리느라 진이 빠졌다. 이번 겨울은 재충전의 기간으로 잡고 그동안 못 읽은 책도 읽고, 아이 키우며, 학교 강의에 충실할 계획이다.”
=가장 응원해주는 가족은 누구인가.
누구 한 명을 꼽을 수 없다. 묵묵히 응원해주시는 아빠와 남동생, 항상 용기를 북돋워 주시는 엄마, 저와 작품을 얘기하고 무대 방향성을 같이 고민하는 언니, 그리고 같은 공연일을 하며 여러모로 도와주고 힘을 주는 신랑까지 모두가 나를 응원해주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가족의 응원을 믿고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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