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숙 캘리포니아 주립대 교수 책 '마이코스피어'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곰팡이’가 함께한다. 경이로운 탄생의 순간, 공기를 부유하는 곰팡이가 아이 몸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엄마 품에 안겨 힘차게 젖을 빨 때, 엄마 피부에 있던 곰팡이가 입으로 쏙 들어간다. 할아버지와 뽀뽀하고, 친구와 뛰어 놀고, 연인과 포옹할 때도 곰팡이가 서로를 넘나들며 소장과 대장에 안착한다.
미생물학자 박현숙 캘리포니아주립대 생물학과 교수는 말한다. “우리 사랑은 수천만 마리 미생물을 공유하는 행위다.” 그가 지은 마이코스피어(mycosphere)는 은밀하고 위대한 곰팡이의 기원과 생태를 들여다본 책이다. 그 곰팡이가 다른 생물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 생태계의 큰 그림을 슬쩍 훔쳐 볼 수 있다.
곰팡이란 무엇인가. 현미경으로 봐야 겨우 보이는 미생물이다. 현재까지 9만9,000종을 발견했는데 과학자들은 약 500만 종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름도 잘 지었다. 곰탕, 곰삭다처럼 오래 묵힌 음식에 붙는 '곰'에 ‘작은 것’을 뜻하는 ‘앙이’를 붙였다. 영어권에서는 버섯을 뜻하는 접두사 마이코(myco)를 사용한다. 두 단어 모두 유기물 사체를 양분으로 자라는 삶의 방식에 딱 맞는 말이다.
곰팡이는 그 자체보다 다른 생명체와의 관계에서 더 존재감을 드러낸다. 오래된 빵이나 과일에 피어나는 포슬포슬한 검은 실타래, 목욕탕 벽을 타고 흐르는 희멀건 점액질 등. 찜찜하지만 이들이 없다면 세상은 호러 영화가 된다. 곰팡이가 파업하면, 숲은 썩지 않은 토끼 사체로 뒤덮인다. 이들 없이는 애초에 생명도 번성하지 못했다. 식물이 육상으로 진출할 때 연약한 식물 뿌리에 공생하며 토양에 뿌리 내리게 도왔다.
지금도 지구는 곰팡이로 연결돼 있다. 가령 숲을 걷다 나무 뿌리에서 오종종하게 튀어나온 버섯 한 무리를 발견했다고 치자. 땅 속에는 곰팡이 뿌리에 해당하는 거대한 균사 덩어리가 나무 뿌리들과 뒤엉켜 있다고 보면 된다. 나무에서 나무로 연결된 이 ‘곰팡이 네트워크’는 양분을 전달하는 통로다. 엄마 나무는 작은 나무에게, 죽어가는 나무는 새로 태어난 나무에게. “곰팡이는 생태계의 다양한 동식물과 공생하며 그들의 삶을 지탱한다.”
인류에게 준 효용을 열거하면 끝이 없다. 푸른곰팡이에서 얻은 ‘인류 최초 항생제’ 페니실린은 1945년 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청년의 목숨을 구했다. 막걸리, 사케, 빵, 치즈, 된장도 곰팡이 덕분. 암과 유전병 치료 열쇠도 곰팡이에 있다. 곰팡이와 동물의 유전자는 의외로 많이 닮았다. 과학자들은 곰팡이를 활용해 암 발생 기전을 해명했고, 유전병 치료제도 찾고 있다. 그러니 딸기 좀 썩게 했다고 너무 미워하지 말자.
이렇게 중요한 곰팡이가 왜 학계에서는 보잘것없는 곰팡이 취급을 받았나. 이유는 단순하다. 너무 작아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모든 것이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구에서 우리는 인간의 미약한 시력으로 세상을 보고, 우리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에 관심을 크게 두지 않고 살아간다”고 콕 짚는다. 저자와 함께 자연의 경이를 탐구하다 보면 인류를 향했던 좁은 시야가 탁 트인다.
최근 생물학 연구 흐름도 흥미롭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유전자 비밀을 해독하면 생명의 비밀이 풀려 무병장수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오판이었다. 주변 환경, 다른 생명과의 상호작용 영향을 간과했다. 유전자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는 유전체 연구는 점차 유전체가 상황에 따라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집중하는 전사체 연구로, 보다 큰 단위인 단백질을 대상으로 한 단백질체 연구로 나아갔다. 이제는 세포 간 경쟁과 협력을 아우르는 ‘미생물 공동체’(마이크로마이옴)를 활발히 연구 중이다. 이처럼 행간마다 ‘모든 생명은 연결돼 있다’ ‘자연에 혼자는 없다’는 주제가 녹아 있는 책. 작디작은 곰팡이에서 뭉클한 위로를 얻는 특별한 경험만으로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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