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봉 작가 14년 만의 개인전
안개가 자욱한 강변에 검은 나무의 형상이 떠오른다. 나무는 정말로 화폭에 떠 있다. 캔버스에 강변의 풍경을 그린 다음, 그 위에 1㎝ 정도 간격을 띄우고 붙인 합성섬유에 나무를 그렸기 때문이다. 합성섬유는 뒤가 비치는 반투명한 재질이어서 강변과 그 너머의 숲 풍경이 어슴푸레하게 보인다.
모호한 현실 세계를 안개 속에 잠긴 강변의 모습으로 표현해 온 화가 이기봉의 개인전 ‘웨어 유 스탠드(Where You Stand)’가 서울 종로구의 국제갤러리와 부산의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지난달 17일부터 이달 31일까지 열린다. 2008년 이후 14년 만의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는 물가의 풍경을 담은 회화를 중심으로 50여 점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작가는 2003년에 국제갤러리에서 열렸던 개인전에서 푸른 물을 담은 수조를 등장시키는 등 오랫동안 물과 그 주변 풍경에 천착해 왔다. 몽환적으로 그려진 나무와 물가의 풍경이 미술품 수집가들에게 인기를 얻기도 했지만 사실 작가가 주목하는 대상은 안개 그 자체다. 작가가 그린 공간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자연의 모습이 아니라 그가 상상해낸 것이다. 최근 현장에서 만난 작가는 “내가 본 세계가 정답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독특한 시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세계들을 소개했다”면서 “세계가 무엇이냐 하면 좀 ‘애매하다’ ‘몽롱하다’ ‘아이고 이거 참 이거 어떡하지’ ‘여태까지 공부 많이 한 걸로 생각했는데 다 의미가 없네’ 이런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문자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연작들도 소개됐다. 어슴푸레한 배경에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를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찍어낸 작품들이다. 이 역시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 세계의 불명확성을 드러낸다. 작가는 “텍스트도 물 표면이라고 가정을 한 것”이라면서 “(비트겐슈타인의 글은) 우리 지성과 또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세상을 파악하려고 해도 우리는 어차피 문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언어적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본질에 다가설 수 없다는 뜻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철학자의 글이 작가의 그림과 맞닿는 지점이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대해서 “결국에 남는 건 내가 움직이는 느낌밖에 없더라”면서 “그래서 이 세계 속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내가 움직이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움직여라’라는 명령을 많이 내리는 편”이라면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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