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법원, 유족이 낸 민사소송 기각
"국가 원수의 면책 특권 인정해야" 논리
"바이든 정부, 언론 자유와 인권 배신" 비판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배후로 지목된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로이터 연합뉴스
2018년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의혹을 받는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에게 미국 법원이 사법적 면죄부를 줬다. 미국 정부가 무함마드 왕세자를 살인 배후로 지목한 지 4년 만에 사법부가 법적 책임을 면해 준 데 대한 비판이 거세다. "자유와 인권을 강조하는 미국의 자부심이 사우디의 오일머니 앞에서 무력해졌다"는 지적이 나왔다.
법원 "살해 배후로 볼 만하지만…"
6일(현지시간) AFP통신 등에 따르면 미국 워싱턴 연방지방법원은 카슈끄지와 약혼했던 하티즈 젠기즈와 인권단체 '아랍 세계를 위한 민주주의(DAWN)'가 2020년 무함마드 왕세자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했다. "국가 원수의 면책 특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기각 이유로, 조 바이든 행정부가 제시한 논리를 법원이 수용했다.
존 베이츠 판사는 "무함마드 왕세자가 카슈끄지 살해 배후라는 원고 측 주장은 믿을 만하지만, 행정부의 입장을 거부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유전무죄의 판결'을 내렸음을 사실상 실토한 것이다.
사우디 태생의 카슈끄지는 미국 워싱턴포스트 등에 칼럼을 쓰면서 사우디 왕실의 비리와 악행을 고발했다. 2018년 10월 혼인 신고를 위해 튀르키예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을 찾았다가 사우디 정보요원에 의해 살해됐다.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은 무함마드 왕세자가 카슈끄지 살해를 지시했다고 결론 내렸다.

조 바이든(왼쪽) 미국 대통령이 지난 7월 15일 사우디아라비아 해변 도시 제다에서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와 주먹으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제다=AFP 연합뉴스
인권 외쳤던 바이든, 결국 봐줬다
카슈끄지 사건은 미국과 사우디의 70년 동맹에 균열을 냈다. '인권 외교'를 내세운 바이든 대통령은 사우디를 '왕따'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제 유가 인상이 미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의 발목을 잡자 자존심을 버렸다. 지난 7월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로 날아가 무함마드 왕세자와 '주먹 인사'를 하는 등 화해 제스처를 취했다.
"'실질적 국가원수'인 무함마드 왕세자가 외교적 면책 특권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소송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사우디가 개발한 논리이다. 카슈끄지 측은 "무함마드 왕세자는 공식 직함이 없어 면책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사우디 국왕은 살만 빈 압둘아지즈이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올해 9월 정부 수반인 총리로 임명됐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를 근거로 그의 면책 특권을 인정했다. 사우디의 꼼수를 눈감아 준 셈이다.

사우디 정보요원들에 의해 살해된 사우디 출신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AP 연합뉴스
"국가 살인 면책해줬다" 비판 거세
바이든 대통령은 난타당했다. 아녜스 칼라마르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은 바이든 대통령을 겨냥해 "국가의 살인에 대한 면책에 기여했다. 언론 자유와 인권이 반복해서 배신당했다"고 말했다며 영국 가디언은 보도했다. 사우디 반체제 인사들 역시 "전 세계의 언론인과 반체제 인사를 표적으로 삼을 수 있도록 무함마드 왕세자에게 허가를 준 셈"이라고 꼬집었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혐의를 벗은 것은 아니다. 이번 소송의 공동 원고인 압둘라 알라우드 DAWN 연구 책임자는 "무함마드 왕세자를 포함한 모든 가해자들이 법의 심판을 받을 때까지 우리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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