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해상에서 선박 위치 은폐 사례 급증
튀르키예 해협서 유조선 22척 발 묶여
러시아의 전쟁 자금줄을 끊기 위한 서방의 ‘러시아산 원유 가격 상한제’가 시행됐지만, 곳곳에서 파열음이 들리고 있다.
대서양에선 러시아산 원유를 러시아와 관계없는 다른 선박으로 환적해 원산지 세탁을 시도한 것으로 추정되는 정황이 다수 포착됐고, 튀르키예 해협에선 한층 까다로워진 보험 가입 조건 때문에 러시아와 무관한 유조선 수십 척의 발이 묶였다.
위치 은폐하고 공해상에서 러시아 원유 환적
6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은 “최근 러시아와 연계된 유조선들이 항로를 은폐하고 몰래 움직이는 이른바 ‘암흑 활동(dark activity)’ 사례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이스라엘 해양정보회사 윈드워드가 남대서양 공해상에서 선박들의 움직임을 분석한 결과, 9~11월 석 달간 러시아 관련 선박의 암흑 활동 등 의문의 행적이 120건 이상 감지됐다. 9월 35건, 10월 50건, 11월에는 40건으로 각각 파악됐다. 앞선 3개월과 비교해 2배가량 증가한 수치다.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산 원유 가격 상한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던 시점과 맞물린다.
국제해양법에 따라 상선들은 충돌 사고를 막기 위해 해상에서 선박자동식별시스템(AIS)을 의무적으로 작동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 선박들은 AIS를 끄고 불법 운항해 항로 추적을 피했다. 몰래 러시아산 원유를 운반했거나, 공해상에서 제3국 선박으로 옮겨 싣는 방식으로 편법 수출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미 대니얼 윈드워드 최고경영자(CEO)는 “이란과 북한이 주로 사용하는 제재 회피 수법”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카메룬 국적 유조선 한 척은 올해 6월 인도양 섬나라 세이셸로 등록지를 변경한 후 아프리카 서쪽 섬나라 카보베르데를 방문해 다른 선박들과 접촉했고, 2주 후에는 대서양 중북부를 거처 나미비아 인근 남대서양으로 향했다. 10월 중순에는 앙골라 해역으로 이동해 6일간 같은 지점에서 위치 신호를 송출하는 이례적인 활동을 보이더니 최종 목적지인 말레이시아 항구에 입항했다. 윈드워드는 “이 선박의 흘수선(선박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선) 변화에 관한 보고서를 보면 운항 과정에서 러시아산 원유를 옮겼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튀르키예 해상 사고 보험 요구에 발 묶인 유조선
러시아산 원유 가격 상한제는 5일부터 발효됐다. 상한액인 배럴당 60달러가 넘는 가격에 수출되는 러시아 원유에 대해서는 보험과 운송 등 해상서비스가 금지된다. 주요 7개국(G7) 소속 보험사들은 전 세계 화물 운송 90%에 보험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러시아 유조선들은 보험 가입이 어려워져서 바닷길이 막혔고, 그간 국제 제재를 무시하고 러시아산 원유를 헐값에 대량 구입한 중국과 인도 같은 나라들도 간접적으로 타격을 받게 됐다.
그러나 뜻밖의 부작용도 적지 않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튀르키예 해협에선 유조선 최소 22척이 통행 허가를 받지 못해 혼잡을 빚고 있다. 유가 상한제 시행 후 보험 미가입 선박이 증가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자, 튀르키예 정부가 자국 해협을 통과하는 모든 유조선에 대해 보험 보장이 유지될 것임을 확인하는 서한을 제출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이다.
튀르키예 정부는 “원유 제품을 실은 화물선이 우리 해협을 통과하는 동안 사고가 발생할 경우 재앙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어, 선주배상책임보험(P&I)이 유효한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해상길이 막히면서 정상적인 물류 운송에도 차질이 생긴다는 게 문제다. 튀르키예 해협은 세계에서 가장 바쁜 항로 중 하나로, 매년 유조선 4만8,000척이 하루에 원유 약 300만 배럴을 싣고 지나간다.
현재 튀르키예에 발이 묶인 유조선 대다수도 제재 대상이 아닌 카자흐스탄산 원유를 싣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FT는 “이번 혼란은 G7의 국제 원유 시장 개입이 낳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며 “러시아산 원유 가격 상한제 작동 메커니즘이 어떻게 합법적인 원유 운송까지 방해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