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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비극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나무가 전하는 희망

입력
2022.12.02 04:3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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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 콜린·에런 베커의 '겨울 봄 여름 가을, 생명'

편집자주

그림책은 ‘마음 백신’입니다. ‘함께 본다, 그림책’은 여백 속 이야기를 통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음을 보듬어 줄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어린이책 기획자이자 그림책 시민교육 활동가이기도 한 신수진 번역가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2001년 9·11 테러로 폐허가 된 미국 뉴욕에서 살아남은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면서 그림책 '겨울 봄 여름 가을, 생명'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웅진주니어 제공

2001년 9·11 테러로 폐허가 된 미국 뉴욕에서 살아남은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면서 그림책 '겨울 봄 여름 가을, 생명'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웅진주니어 제공

제주도 곳곳의 오름을 오르다 보면 ‘산담’이라고 불리는 돌담으로 둘러싸인 무덤을 흔히 볼 수 있다. 산책 코스로 사랑받는 이름난 오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제주의 옛사람들은 정말로 무덤을 집처럼 여겼기 때문에 산담을 쌓았다고 한다. 죽음과 관련된 장소를 혐오 시설로 여기는 오늘날의 정서와는 사뭇 다르다. 밤에 들판에서 길을 잃었을 때 산담 안으로 들어가 잠을 자면 무덤 주인이 손님처럼 보살펴 준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삶과 죽음은 경계가 모호하다. 그런 제주에서의 생활이 10년 넘다 보니 무덤 옆을 지나는 일이 남의 집 앞을 지나는 일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곤 한다.

제주 곳곳의 4·3 유적지 역시 죽음이 나의 일상과 연결되는 매개가 된다. 고요한 산책길이 4·3 때 전소된 ‘잃어버린 마을’이기도 하고,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관광지가 알고 보면 참혹한 학살터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억울한 죽음을 알게 되면 그것은 기념일에만 떠올리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나의 일상과도 연결돼 있는 사건이 된다.

대통령 사저로 잘 알려진 고층 아파트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현장에 지어졌다.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그곳에 추모비 하나 세워지지 못하고 흔적이 말끔히 지워져 버렸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 아프다. 우리는 대도시에서 일어난 비극의 현장일수록 어떻게든 지우려 애쓴다. 하지만 아마도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땅값이 비싼 곳 중 하나일, 미국 뉴욕 맨해튼 중심가에는 9·11 테러 추모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관광객과 시민들의 눈길과 발길이 가장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에 거대한 무덤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재산권을 지키는 일보다 비극적 사건의 희생자들을 사회적으로 기억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테러 이후 10년, 푸른 이파리를 피우며 되살아난 나무를 보고 사람들은 과오를 기억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며 회복의 희망을 찾는다. 웅진주니어 제공

테러 이후 10년, 푸른 이파리를 피우며 되살아난 나무를 보고 사람들은 과오를 기억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며 회복의 희망을 찾는다. 웅진주니어 제공

9·11 테러로 파괴된 쌍둥이 빌딩이 있던 자리는 거대한 텅 빈 공간으로 남겨져 있다.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사건으로 인해 이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됐음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기념물이다. 그 앞에는 해마다 하얀 꽃을 가득 피우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이 나무는 테러의 잔해에서 마지막으로 구조되었던 ‘생존자’다. 사건 당시 이미 서른 살 가까이 되었던 이 늙은 나무에서 뜻밖에 초록 잎사귀를 발견한 사람들은 나무를 정성스레 다른 곳으로 옮겨주었다. 나무는 검게 그을린 상처를 간직한 채로 10년의 세월을 견디며 조금씩 자랐고, 새잎을 올리고 다시 하얀 꽃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이 놀라운 나무에 대한 이야기는 그동안 여러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중에서도 '겨울 봄 여름 가을, 생명'은 '머나먼 여행'(웅진주니어, 2014) '당신은 빛나고 있어요'(웅진주니어, 2019) 같은 그림책으로 유명한 에런 베커가 계절과 시간의 흐름, 한 세대가 지나도 사그라들지 않는 애도의 감정까지 따스한 색감으로 그려낸 점이 돋보인다.

참사의 현장에서 구출됐던 나무는 인간들의 시선이 닿는 땅 위에서는 한동안 자라지 못하고 그저 새들이 둥지를 트는 장소가 되어줄 뿐이었다. 그러나 마시 콜린의 글과 에런 베커의 그림은 땅속으로 깊이 뿌리를 뻗어가는 나무의 의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나무에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고 돌봐주었던 사람들의 간절함까지도 담아냈다.

겨울 봄 여름 가을, 생명·마시 콜린 글, 에런 베커 그림·정회성 옮김·웅진주니어 발행·48쪽·1만4,000원

겨울 봄 여름 가을, 생명·마시 콜린 글, 에런 베커 그림·정회성 옮김·웅진주니어 발행·48쪽·1만4,000원

이 책은 나무 자체의 생명력과 회복력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이 사회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는데도 의미가 있다. 그 나무 아래서 사진을 남겼던 희생자를 기억하는 누군가는 자신의 아이와 함께 다시 돌아온 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는다. 나무 주변에는 다양한 인종과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여서 추모를 이어간다.

우리의 어리석음과 실수를 기억하는 일이란 어쩌면 말끔히 잊고 묻어두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으로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면 현재의 과오를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 비극을 똑바로 응시하고 기억하지 않는다면, 희생자를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추모가 이어지고 있는 서울 이태원의 골목을 생각한다. 애도와 기억이 담겨야 할 장소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화려함으로 덮이는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라며 이 그림책을 한 장면 한 장면 응시해 본다.

신수진 어린이책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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