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기관 총동원한 조직적 인권침해"
2921명 명단 첫 확인... 김순호도 포함
징집 의문사 희생자 조사 안 한 건 한계
서울대 74학번 권형택(63)씨는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하다 강제징집된 뒤 프락치(정보원) 공작에 동원됐다. 군은 전역 후에도 권씨에게 학내 동향 파악과 정보보고를 강요했다. 23일 2기 진실ㆍ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기자회견에 참석한 그는 “동료 정보를 수집하고 배신하도록 국가가 반(反)인권 행위를 강요했다”며 “40년도 더 지났지만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떨린다”고 토로했다.
진실화해위는 이날 1970~80년대 군사정권 시절 대학생들에게 프락치 활동을 강요한 ‘강제징집ㆍ녹화선도 공작’ 사건을 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로 결론 내렸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공식 피해자만 187명, 명단 공개자는 2,900명을 넘는다. 프락치 공작과 관련해 국가기관이 개인별 피해를 인정한 건 처음이다.
조사 결과, 군사정권은 정부기관을 총동원해 운동권 대학생들을 강제 입대시켰다. 위수령(1971년), 긴급조치 9호(1975년), 계엄포고령 10호(1980년) 등에 근거해 국방부는 물론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치안본부(경찰청), 병무청, 법무부, 교육부, 군사안보지원사령부 등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정근식 진실화해위원장은 “과거 내무부와 치안본부는 최전선에서 공작을 지휘한 기관”이라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대학생 프락치 의혹과 관련한 공식 조사가 없었던 건 아니다. 1984년부터 2010년까지 국회 진상규명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 1기 진실화해위 등에서 다섯 차례나 조사했지만, 국방부가 사실을 부인하는 등 번번이 진실규명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번 조사를 통해 2,921명의 강제징집ㆍ녹화선도 공작 관련자 명단이 처음 확인됐다. 군사안보지원사령부가 국가기록원에 이관한 개인별 존안자료 2,417건 등을 분석한 결과다. 존안 자료엔 피해자들의 연행, 휴학, 입대 조치와 관련한 내용이 담겼다. 해당 명단엔 최근 프락치 활동 의혹이 불거진 김순호 초대 행정안전부 경찰국장과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 더불어민주당 윤영찬ㆍ기동민 의원 등도 포함됐다. 진실화해위는 이 중 2020년 12월부터 올 7월까지 진실규명을 신청한 207명 중 187명을 공작 피해자로 판단했다.
진실화해위는 국가기관의 공식 사과와 함께 국방부 차원의 조사기구 설치,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 배ㆍ보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을 정부에 제안했다. 또 추가 접수된 사건 등을 조사해 2차 진실규명에 나설 방침이다. 김 국장 역시 조사 대상에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정 위원장은 “내주쯤 조사개시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김 국장 역시 본보에 “조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피해자로 인정받은 9명도 참석했다. 피해자단체 ‘강제징집녹화ㆍ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의 황병윤 상임위원장은 “진실화해위 결정은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첫 단추”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다만 가해자들과 강제 입대 뒤 의문사한 이들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점은 한계로 꼽힌다. 의문사진상규명특별위원회는 성명을 통해 “의문사한 희생자들을 조사하지 않아 총체적 피해 실태의 진실을 밝힐 기회를 저버렸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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