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렬 환경 운동단체 명화 '볼모' 삼는 과격 시위 '논란'
명성 높은 작품만 골라 수프·으깬 감자 등 음식 투척
"왜 예술 건드리냐" 반감도... 작품 손상은 거의 없어
비폭력 시민 저항 운동 일환, 지속 가능성 고민해야
케이크는 시작이었다. 으깬 감자로 짓이기고, 토마토 수프까지 뿌려댔다. 전 세계가 사랑하는 거장의 예술 작품에 날라온 '어퍼컷'은 강렬했다. '거사(擧事)'를 마친 이들은 있는 힘껏 외쳤다. "예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자연을 더 사랑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곧 사라지게 될 인류의 미래를 경고하는 것입니다."
유럽을 중심으로 극렬 환경운동가들의 '명화(名畫) 테러'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알리려는 과격한 시도가 전에도 없었던 건 아니지만, 유명 예술 작품을 작정하고 '볼모'로 삼았다는 점에서 주목도를 높였다.
케이크에 으깬 감자, 수프까지 투척... 명화 타깃 '충격요법'
처음엔 손바닥을 갖다 대는 정도였다. 손에 접착제를 바른 뒤 액자 틀에 붙여 놓는 게 시작이었다. 작품은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이 구호를 외칠 동안 쉽게 끌어낼 수 없도록 시간을 벌겠다는 전략이었다.
이들의 기행은 곧바로 전 세계 뉴스를 장식했다. 대중의 관심에 용기를 얻은 걸까. 급기야 그림에 음식을 투척하는 퍼포먼스까지 등장했다. 지난달 14일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에서 반 고흐의 작품 '해바라기'에 하인즈 토마토 소스 두 통이 뿌려진 데 이어, 세계적 밀랍인형 전시관 마담투소 런던 전시관에선 찰스 3세 국왕의 밀랍인형 얼굴이 케이크로 얻어맞았다.
명화의 수난은 국경을 초월했다. 독일 포츠담의 바르베리니 박물관에선 클로드 모네의 작품 ‘건초더미'가 희뿌연 으깬 감자로 덮였고, 호주 멜버른의 빅토리아 국립미술관에선 피카소의 반전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이 표적이 됐다.
에너지값 급등 여파, 최악의 생활고 겪는 영국의 환경단체가 선봉
'명화 테러' 선두주자는 영국의 환경단체 '저스트 스톱 오일(Just Stop oil)'이다. 화석연료에 의존하지 않는 사회를 꿈꾸는 이 단체는 △새로운 석유 가스 추출 사업 중단 △정부 보조금 혜택 전면 폐지 △대중교통 무료 이용 등을 영국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영국 정부가 화석연료 감축정책을 뒤집으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주로 길거리를 누벼왔던 환경운동단체가 미술관으로 행진 방향을 돌린 건, 대중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충격요법'이다. 석유 창고를 점령하고, 자동차 매장에 페인트칠을 하고, 축구 경기 중간에 난입해 골대에 아무리 매달려봐도 사람들의 관심은 '반짝' 하고 그쳤다. 저스트 스톱 오일 대변인인 멜 카링턴은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정치인들은 실제 일어난 사건보다 기사의 헤드라인에 더 크게 반응한다는 점에서 유명 작품을 타깃으로 잡은 건 매우 성공적"이라고 자평했다.
공격에도 나름의 전략은 있었다. '해바라기'에 투척한 토마토 수프는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최악의 생활비 위기를 겪고 있는 영국 민심의 분노를 상징한다. 반 고흐의 '꽃이 핀 복숭아 나무'를 택한 건, 그림 속 배경인 프로방스 지역이 지난봄 발생한 극심한 폭염 이후 물 기근에 시달리고 있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다. 생존과 생명의 가치가 예술보다 덜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품고 있는 고발 퍼포먼스인 셈이다.
비폭력 시민 저항 운동 뿌리는 '멸종 반란'... "그린피스도 기후위기 공범"
거리 점거에서 명화 테러까지.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파괴적인 집단행동도 서슴지 않는 이들의 활동은 '비폭력 시민 저항 운동'의 일환으로 소개된다. 시초는 2018년 결성된 국제환경운동 단체 '멸종반란'(Extinction Rebellion·XR)이다. 스웨덴의 청소년 기후활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학교를 결석하는 대신 기후위기 행동을 촉구하는 시위에 참여하며 시작된 '기후파업'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구(舊)체제에 저항'이란 출발선은 같지만, 멸종반란은 파괴성을 차별화 전략으로 삼았다. 이들은 경찰의 체포나 투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긴다. 재판정도 기후위기 심각성을 한 번 더 외칠 수 있는 자리라고 여긴다. 수백 명이 잡혀가도 또 다른 수백 명이 멈추지 않고 계속 나오는 이유다.
이들의 첫 번째 타깃이 세계적 환경단체인 그린피스 사무실 점거였다는 점도 상징적이다. 멸종반란은 "모든 것이 실패하는 와중에 다르게 행동하지 않는 것은 기존 시스템에 대한 공모로밖에 설명될 수 없다"며 그린피스의 운동 방식에 반기를 들었다.
멸종반란은 각국 정부가 기후 비상행동을 선언하고, 2025년까지 탄소배출량을 제로로 만드는 법적 기반을 만들고, 변화를 감독할 시민의회를 구성하자고 촉구한다.
명화 손상 거의 없어... 과격 시위 넘어선 후속 전략 고민할 때
반응은 엇갈린다.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즉각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에 반기를 들기 쉽지 않다. 최근 영국의 여론조사 기관 Omnisis가 지난달 20일 실시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환경보호를 위해 비폭력 직접행동을 지지한다는 의견은 66%에 달했다.
다만 방식에 대해선 반감도 적지 않다. 익명을 요구한 한 런던 시민은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인류 최고의 예술 작품을 표적으로 삼는 것은 우려스럽다"며 "환경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은 내셔널 갤러리를 돌아다니지 않는다. 그들의 문제 제기 방식은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탈리아에서 온 루치아나 페조티씨도 "기후 활동가들의 저항운동을 지지하지만 예술을 괴롭히는 것은 반대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대중의 걱정은 예술 작품의 '안위'다. 다행히 테러를 당한 작품 중 회복 불가능한 손상을 입은 건 없다. 유명 작품들은 이미 유리나 액자로 보호돼 있기 때문에 겉표면만 닦아내거나 액자 틀을 교체한 정도다. 미술복원가인 사이먼 길레스피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림에 인위적 압력을 가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시위대는 나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수위를 조절했다"고 평했다.
문제는 '명화 테러' 그 이후다. 사람들의 관심을 행동으로 바꾸기 위한 후속조치가 필요하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청사진은 없어 보인다. 저스트 스톱 오일은 최근 영국 고속도로 점유 시위에만 집중하고 있다. 환경운동 연구자인 사라 피카르 소르본 누벨 대학교 연구원은 "활동가들에게 미술관은 단지 홍보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불꽃을 일으킨 뒤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전략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때"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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