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한 디자인, 실험적 편집, 출판계 지평 확장
출판사 수류산방(樹流山房). 팔릴 책보다 세상에 없는 책을 만든다. 다른 곳에선 제작 불가능한 책에 도전한다. 대담한 디자인과 독창적 편집이 특기다. 북악산 자락 아래 책으로 ‘예술’ 한다고 소문난 곳. 매년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출판계에서 20년 세월을 헤쳐왔다.
수류산방 문을 열고 들어가 박상일 방장을 만났다. “왜 이렇게까지 하나요”라는 질문에 “알려지지 않은 책을 세상에 내는 징검다리가 되고 싶어요”라는 대답. 듣던 심세중 대표가 한숨을 푹 쉰다. “회사 경영도 해야 하고 수익도 내야 하는데 아직도 책을 잘 만드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죠.”
수류산방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덕분에 출판의 경계는 넓어졌다. 최근 펴낸 책은 무형문화재 궁중채화장(宮中綵花匠) 보유자 황수로 선생의 작품집 ‘한국의 아름다운 꽃, 병화’. 일본의 문화 말살 정책으로 단절됐던 조선 궁중 꽃 문화 전통을 되살린 황 선생의 작품들을 담았다. 생소한 분야, 대중성은 높지 않지만 수류산방은 기어코 책을 편찬했다. “소멸해가는 궁중채화장을 알리려 평생 동안 노력한 황 선생의 열정과 수류산방의 철학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박 방장)
책은 크다. 가로 23㎝, 세로 30㎝ 판형은 일반 책의 두 배다. 궁중 꽃의 장엄한 사진을 구현하기 위한 크기지만, 너무 과하지 않은 느낌을 주기 위해 한지 느낌의 종이로 차분한 맛을 더했다. 편집과 디자인 실험을 계속해 가제본만 8종. 심 대표는 “책에 들어간 주석들은 고문서를 뒤져 가며 팩트 체크를 했다”며 “책 작업에만 1년 반이 걸렸다”고 했다. 일반적인 책 제작 기간의 두 배 가까이 소요됐다.
이들의 실력을 알아본 눈 밝은 이들은 많다. 관공서, 미술관, 다른 출판사가 수류산방에 일을 의뢰한다. 지난 8월에는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국내 최고 조각가 문신(1923~1995)의 도록을 만들었다. 도록은 작품의 전면 사진만 사용하는 게 보통인데, 수류산방은 조각 전ㆍ후ㆍ좌ㆍ우 사진을 실어 조각의 입체성을 구현했다. 박 방장은 “함께 작업한 출판사 외부 분들에게는 재앙이었을 것”이라며 “그래도 독자들은 좋아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웃었다.
상업적이지 않은 목적으로 만드는 책도 이들의 손끝에선 작품이 된다. 매일유업 창사 50주년 기념 사사(社史) ‘매일50’은 독일 디자인계의 권위 있는 상 아이에프(iFㆍ인터내셔널 포럼)에서 커뮤니케이션 부문 상을 받았다. 올해 초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주최해 열린 ‘러시아 이콘(성화)’ 전시회 도록은 대담한 빨간 표지, 화려한 사진, 이콘 역사를 꿰뚫는 상세한 주석 설명을 통해 소장욕구를 자극한다.
배우도 뛰어나야 하지만 감독도 뛰어나야 좋은 영화가 나온다는 게 수류산방의 신념. 심 대표는 “원고에서 얼마나 멀리까지 뻗어 나갈 수 있는지 고민한다”며 “원고는 사진, 디자인 등과 같이 책의 구성요소 중 하나”라고 했다. 수류산방은 내년 창립 20주년을 맞는다. 이달 중순 사직동으로 회사도 옮긴다. “인연이 되는 분들과 함께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도 계속 저희 한계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가겠다.”(박 방장) "앞선 일들이 밀려서 기다리는 다른 저자분들께 미안해요."(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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