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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도망가도 왜군에 맞서 싸운 여성들… 기록이 없지 기여가 없나

입력
2022.11.05 04:3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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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행주대첩에서 활약한 여성들...정사(正史)는 기록하지 않았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이한 작가는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로서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남녀가 함께 고민해 볼 지점, 직장과 학교의 성평등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경기 고양시가 2019년 주최한 행주문화제에서 상연된 뮤지컬 '행주대첩'의 장면. 고양시 제공

경기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행주산성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긴 행주대첩의 현장으로 유명하다.

1592년 4월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된다. 초기에는 조선군이 밀렸으나 수군과 의병의 활약으로 전세가 뒤바뀌기 시작한다. 명나라 군대가 참전하자 조선군은 명군과 연합군을 꾸려 반격한다. 조명연합군은 1593년 1월 평양성을 탈환한다. 일본군은 후퇴하여 임진강 이남에서 한양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한다.

전라도 순찰사 권율은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기 시작한다. 1593년 2월 한양 서쪽 20리에 있는 한강변의 행주산성으로 진을 옮긴다.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서였다. 권율의 부대 외에 승려 의병군도 집결하여 병력은 모두 1만여 명이었다. 권율은 인근 주민을 성 안으로 모이게 한다. 전투에 대비하여 목책을 만들어 세우고 토제(土堤·흙으로 만든 둑)를 쌓게 한다.

한편 일본군은 평양성전투에서 크게 패한 후 한양에 집결해 병력을 정비하며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행주산성에 조선군의 진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일본군은 1593년 2월 12일 새벽, 공격을 시작한다. 3만여 명의 대군으로 행주산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고 병력을 나눠 파상공세를 벌인 것이다.

성 안에서는 관군과 의병, 승병, 민간인들이 모두 합세하여 결사항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이 조총을 쏘면서 돌진해오자 조선군은 각종 총통(銃筒)·화차(火車)·석포(石砲) 등을 이용해 화살과 돌을 쏘아 보내 무찌른다. 적군이 마른 풀에 불을 붙여 바람을 이용해 화공(火攻)에 나서자 물을 퍼부어 불을 꺼 버린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미리 준비해서 차고 있던 주머니에 든 재(灰)를 적병의 얼굴에 뿌리고 돌을 던지며 싸운다. 이때 여자들은 앞치마로 돌을 날라 투석전을 도왔다.

일본군은 하룻동안 여러 차례나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충청도에서 조선군 지원군이 오고 있는 상황이기에 일본군은 행주산성에서 물러난다. 마침내 승리한 조선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올랐다.

행주산성 대첩문을 들어서면 바로 권율 장군상이 보인다. 박신영 작가

권율 장군은 행주대첩의 공로를 인정받아 도원수로 임명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대대적인 한양 수복 작전을 예측하고 철수를 서두르게 되었다. 임진왜란 전쟁사에서 중요한 고비가 되었기에 이 싸움은 진주대첩·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힌다.

행주산성은 행주치마의 유래에 대한 민담으로도 유명하다. 행주대첩 당시 여성들이 앞치마로 돌을 날라 투석전에 참가했다. 그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당시 입었던 짧은 앞치마를 '행주'산성의 이름을 따서 '행주치마'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1517년 발간된 '사성통해(四聲通解)'에 이미 'ᄒᆡᆼᄌᆞ쵸마'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이다. 'ᄒᆡᆼᄌᆞ쵸마'는 1527년에 나온 '훈몽자회(訓蒙字會)' 등 여러 문헌에서도 보인다. 그런데 임진왜란은 1592년, 행주대첩은 1593년에 발생한 사건이다. 그렇다면 이미 있던 '행주치마'라는 단어에 행주(幸州)라는 지명을 연관지어서 어원을 설명했다고 봐야 한다. 결국 행주치마의 유래에 대한 이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민간어원설이었다.

권율 장군상 뒤에 행주대첩 과정을 설명한 부조들이 있다. 그중 여성 활약을 담은 부조. 박신영 작가

그러나 어원에 대한 설명은 거짓이라도 이 이야기에는 중요한 진실이 담겨 있다. 바로, 여성들이 행주대첩에 큰 기여를 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민간에 구전돼 널리 알려지고 기억됐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행주산성에 있었던 여성들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없다. 행주대첩에서 활약한 여성들의 이야기는 당대의 정사(正史)에 기록돼 있지 않다. 행주치마에 대한 구전 설화에만 등장할 뿐이다. 행주산성에 있던 여성들은 돌을 모아오고 날랐다. 화공(火攻)에 대비하여 물을 길어왔다. 재를 넣을 주머니와 재를 미리 만들어 두었다. 거기에다가 너무나 일상적인 여성의 노동인 밥짓기와 옷 수선, 군복이나 깃발 만들기, 빨래하기, 부상병 돌보기를 했을 것이다. 여성들이 이러한 일을 행주대첩 당시 처음으로 해 보았다면 이렇게나 조직적으로 움직여 전쟁승리에 크게 기여할 수는 없다. 여러 번 해 봤기에 경험이 있었을 것이고, 이번이 처음이라도 선대 여성 조상에게 전해받은 지식을 갖고 있었기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역사 이래로 여성은 늘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여성들이 어떻게 참여했고 기여했는지에 대한 정식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행주대첩의 경우, 여성들의 물건인 행주치마가 현장에 있었기에, 행주치마와 함께 여성들의 참전 역사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늘날 우리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은 왕까지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전쟁이었다. 그런데 산성에 들어가 용감하게 싸운 여성들의 업적이 당시 역사서에 한 줄도 기록돼 있지 않다니, 충격이다. 그렇다면 행주대첩 참여가 아닌, 임진왜란을 겪어낸 보통 여성들의 이야기는 전후에 기록에 남았을까?

어떤 형태로 기록되었는지 아마 짐작이 갈 것이다. 적군에게 성폭력당한 이야기나, 성폭력을 당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야기가 주로 기록되어 있다. 그것도, 전시 성폭력인데 '정절이 훼손당했다'거나 '절개를 지켜 순절했다'는 식의 표현으로.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뻔하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여성에게 가장 중요하게 기대되는 가치는 정조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후 복구 과정에서 모범이 될 만한 사람들의 행적을 기리고자 광해군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간행하면서 여성의 업적은 열녀 위주로만 소개한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임진왜란 전후 10년 동안 왜적과 명군이 우리나라에 득실거려 부녀자들이 그 몸을 더럽히게 되어 옛날처럼 정숙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당시 기록할 권리를 가진 엘리트 남성들은 여성의 전시 활약을 목격하고서도 오로지 여성의 정절에만 관심을 가진 것이다. 그러니 제대로 정사(正史)에 임진왜란 당시 여성들이 참전하고 기여한 바를 기록할 리가 없다.

그러나 약자들의 삶은 정식 기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역사에 남기 마련이다. 행주치마 유래 말고 다른 민담을 살펴보자. 이번에는 경기 고양시에 전해지는 '밥 할머니 이야기'다. 밥 할머니는 실존 인물로, 임진왜란 당시 여인 부대를 모아 활약한 여성 의병대장이다. 현재 경기 고양시와 서울 은평구 북한산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하고 행주산성의 승병을 돕기 위해 산 위에서 봉화를 올리고 북과 꽹과리 징 등을 울려 적군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등의 활약을 했다고 한다. 아군의 사기를 북돋아주면서 주먹밥을 나누어 주는 등등, 여성에게 기대되는 기본 활동도 물론 다 했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고양시 동산동 밥할머니 공원에 있는 밥할머니 석상(고양시 향토문화재 제46호)으로 후세에 기림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 의병장의 성명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오씨라는 설도 있고 박씨라는 설도 있다. 오직 '밥'만 강조된 이름으로 전해진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야기 속 여성 의병장의 활동도 점점 축소되어 '여성이 할 법한' 역할 위주로 전해지고 있다. 왜 그럴까?

행주치마의 유래에 대한 민담과 마찬가지다. 행주대첩에 참가한 여성들의 업적은 부엌에서 남성을 위한 밥을 해야 하는 여성의 본분을 상징하는 행주치마가 있기에 겨우 살아남아 후세에 이야기로 전해졌다. 밥할머니 역시 직접 전투에 참여한 것보다 남성을 위해 밥을 해준 업적을 최우선으로 인정받았기에 덤으로 의병대장의 업적도 지금까지 전해지고 추앙받는 것이다. 이런 망탈리테(mentalités·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집단적인 사고방식)는 21세기 현대인이 제작하여 행주산성에 걸어놓은 안내문에서도 보인다. 어떤 업적을 세우든, 여성은 아이 수준의 지능을 가진 '아녀자'이고 여성의 본분은 '밥짓기'라는 것이.

행주치마 형태의 천에 행주치마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위에서 5번째 줄을 보자. ‘아녀자’라는 표현이 보인다. 여성의 활약을 전하는 21세기의 안내문에서조차 여성을 아녀자(兒女子)라고 비하하는 조선 시대 표현을 쓰고 있다. 박신영 작가


행주치마 형태의 천에 임진왜란 당시 '밥 할머니'의 활약을 설명하고 있다. 제목은 ‘여성 의병대장’인데 그 부분 행적은 빼고 서술하고 있는 문제가 보인다. 박신영 작가

젠더살롱 코너에 연재를 시작한 지 벌써 1년 10개월이 넘었다. 그동안 본문 내용이나 주제와 상관없이 '여성은 역사에 아무 기여도 안 했다'거나 '여자도 군대 가라'는 댓글을 많이 봤다. 이번 글은 그에 대한 답이다.

행주치마와 밥할머니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여성은 늘 역사에 기여했고 전쟁에 나가 싸웠다. 단지 기록자가 남성이기에 제대로 된 기록이 없을 뿐이다. 기록이 있더라도, 남성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점을 남성이 기록했기에 진짜 여성의 업적을 알 수는 없다. 정절 타령만 하고 있는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이 좋은 예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된다면, 아주 단순히 생각해 보자. 우리의 조상 여성들이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먹었다면 후손인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을 것 아닌가? 그러니 여성이 한 일이 없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기록이 되지 않은 것뿐이다.

박신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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