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부터 한국일보 기자로 활동
1980년 신군부에 맞서다 강제해직
서울 동작에서 12~14대 국회의원
1998~2000년까지 국회 사무총장
한국일보 기자로 신군부에 맞서다 강제해직 당한 3선 국회의원 출신 박실 전 의원이 29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83세.
1939년 전북 정읍에 태어난 박 전 의원은 전주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 재학 시절 4·19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1963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정치부 차장 시절인 1977년 16대 한국기자협회 회장을 지냈다. 1980년 1월 신민당 제2차 헌법개정 공청회에 ‘한국기자협회 고문’ 자격으로 참여해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해야 하고, 헌법 전문에 언론 자유를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해, 신군부에 의해 강제해직 당했다. 같은 해 11월 기자 출신으로는 드물게 1차 정치활동 규제자 811명에 포함됐다.
1984년 정치활동 규제에서 풀린 박 전 의원은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세력과 구 신민당 계열 인사들이 모인 신한민주당 창당 작업을 주도했다. 창당선언문을 직접 쓰고 대변인을 맡아 활동했다.
1985년 제12대 총선에서 서울 동작에 출마해 당선돼 국회에 입성했다. 당시 ‘박해받은 실력자 박실’이라는 표어를 내걸며 야당 돌풍을 이끌었다. 1987년 신한민주당을 탈당한 뒤, 통일민주당에 입당했다가 이후 평화민주당(평민당) 에 몸을 담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행보를 같이 해 동교동계 인사로 분류된다. 1988년 평민당 원내수석부총무에 임명됐고, 같은 해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평민당 후보로 동작을에 출마해 당선됐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는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서 당선돼 3선에 성공했다. 1995년 김 전 대통령이 정계에 복귀한 뒤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해 홍보위원장을 맡았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1998년부터 2000년까지는 장관급인 국회 사무총장을 지냈다.
2001년에는 4·19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됐다. 정계 은퇴 후에는 헌정회 부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영어와 중국어 구사 능력이 뛰어나 한때 주중대사 물망에도 올랐다.
유족은 부인 전은희씨와 아들 정원(단국대 법대 교수) 석원(한국일보 논설위원)씨, 며느리 전아정·오진숙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강남성모병원, 발인은 1일 오전 8시. (02)2258-5979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