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재배~와인 병입 전 과정 '자연 그대로'
90년대 프랑스서 시작… 8년여 전 국내로
팬데믹發 급변한 주류문화 속 치솟은 인기
취향·소비로 나를 표현하는 젊은 층의 선택
와인 잔을 들어올린다. 빛에 비친 색을 보고, 잔을 빙글빙글 돌려도 본다. '와인 시음' 하면 떠오르는 그런 동작들이 그곳에는 없었다. 그저 처음 맛보는 음식에 대한 호기심을 가득 안고 편하게 한 모금씩 음미할 뿐이다.
이달 24일 서울 강남구에서 열린 책 '내추럴 와인 메이커스' 북토크 겸 시음회장. 잔을 들어올려 색을 바라보는 흉내를 내며 "우리 이런 건 안 하잖아요"라고 하는 저자 최영선 비노필 대표의 말에 청중 20여 명의 웃음이 터졌다. 기존 컨벤셔널 와인 문화와 내추럴 와인 세계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다. 직관적 맛을 선사하는 내추럴 와인이 격 없이 와인을 즐기고 싶은 이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내추럴 와인은 포도 재배부터 와인 양조·병입까지 전 과정에서 인위적 장치를 최대한 배제하고 생산한 와인을 말한다. 유기농 포도를 사용하는 유기농 와인보다도 까다로운 조건이다. 가령 포도 재배에는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배양 효모 없이 자연 효모로만 발효시킨다. 그래서 일정한 맛을 내기 어렵지만 자연스러운 맛 그대로가 강점이다. 와인 보존 등을 위해 쓰는 이산화황도 극소량만 쓰거나 아예 쓰지 않는다. 대량 생산을 위한 모든 과정을 걷어냈다. 인증제도는 따로 없다. 1990년대부터 자연 그대로 양조하겠다는 철학에 공감하는 생산자들이 모인 내추럴 와인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전체 와인 수입량의 5% 넘을 것으로 추산"
국내에서는 최근 2, 3년 사이 내추럴 와인의 인기가 급증했다. 이날 소규모 북토크 행사는 마감 후에도 대기 예약자가 있었을 정도다.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로 책 출간 2년 만에 서울, 부산, 제주 지역에서 열린 이 행사 대부분이 매진이었다. 시음회를 겸하기 때문에 참가비가 10만 원까지 가는 경우도 있지만 다채로운 내추럴 와인을 전문가와 즐길 수 있는 시간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소비자들이 많다는 얘기다. 프랑스 내추럴 와인 1세대 생산자들을 직접 인터뷰해 책을 쓴 최 대표는 국내에 내추럴 와인을 처음 소개한 인물이다. 2017년부터 현지 생산자들이 참가하는 시음회 '살롱 오'를 개최해 왔다.
관련업계는 지난해 전체 와인 수입량 중 내추럴 와인 비중이 5%를 넘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전체 와인 수입량 자체가 2년 전보다 배로 성장한 점을 감안하면 성장폭은 더 크다. 시장이 커지자 수입사도 늘었다. 1세대 수입사인 와인엔의 곽동영 대표는 "최근 와인업계 젊은 종사자들이 1인 수입사를 차린 경우가 눈에 띈다"며 "약 5년 전에는 손으로 꼽던 내추럴 와인 수입사 수가 이제 40~50곳은 되는 듯하다"고 했다. 소매점·와인바도 마찬가지다. 2020년 서울 청담동에 첫 내추럴 와인 소매점 '내추럴보이'를 낸 정구현 대표는 "이 상권에만 이제 내추럴 와인 취급 소매점이 4곳은 넘는다"며 "청담동, 합정동, 성수동, 한남동 등에 관련 소매점이나 와인바가 많다"고 말했다. 소위 '힙하다'고 불리는 상권들이다.
급변한 주류 문화 배경…'차별화된 취향' 젊은 층 주도
내추럴 와인 성장의 판을 깔아준 건 코로나19 팬데믹이다. 회식으로 대변되는 한국 술 문화가 격변한 영향이 컸다. 혼자 마시는 술인 '혼술', 집에서 마시는 술인 '홈(Home)술'에 적합한 주종이 인기를 얻었다. 조금 비싸도 좋은 술을 과하지 않게 즐기는 새로운 문화는 와인이나 위스키의 인기를 불러왔다.
특히 내추럴 와인 바람을 주도한 건 2030 젊은 층이다. 인위적 조치를 최소화한 내추럴 와인은 매해 일률적인 맛을 내는 게 애초에 불가능하다. 이 점이 오히려 차별화된 취향을 자기 표현이라고 여기는 젊은 층을 공략했다. 와인 애호가로 1년 전부터 내추럴 와인을 즐긴 직장인 손계성(33)씨는 "특이하고 개성이 있어 좋다"면서 "컨벤셔널 와인에서는 결함이라고 말하는 특징까지도 내추럴 와인에서는 개성이 되는 것이 흥미롭다"고 했다. 취미생활로 막걸리를 담글 정도로 주류 문화에 관심이 많은 직장인 이윤주(36)씨는 "미생물 활동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것이 흥미롭고, 자연효모를 사용하는 방법이 우리 정통 술과도 비슷한 것이 재밌다"고 말했다.
젊은 층이 민감하게 여기는 가치·윤리 소비와도 연결된다. 화학물질을 최소화한 내추럴 와인을 건강한 먹거리로 보고, 생산 과정도 친환경적이라고 판단한 것. 경기도에 사는 대학생 서희연(가명·21)씨는 "대규모 포도 재배로 환경 파괴가 심한 컨벤셔널 와인과 내추럴 와인 생산과정이 다르다는 점이 좋다"면서 "내추럴 와인을 마실 때는 내 몸에도 조금 덜 미안하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건강과 환경이 주요 테마가 되면서 비건·발효음식에 눈을 돌린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들도 내추럴 와인을 취급하기 시작했다. 맛과 이미지 모든 면에서 어울리기 때문.
이 밖에도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의 홍보 효과도 있다. 방송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내추럴 와인을 즐기는 모습이 자주 노출되면서다. 또 기존 컨벤셔널 와인처럼 어렵게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캐주얼한 이미지도 접근성을 높였다. 팬데믹으로 갑자기 귀국하게 된 셰프들이 해외에서 경험한 내추럴 와인 문화를 적극적으로 들여온 것도 한 요인이다.
그럼에도 영원한 '비주류'?… 와인 다양성 문화로
물론 태생적으로 내추럴 와인은 메이저, 주류가 될 수는 없다. 소량 생산 방식이라 규모 면에서 일정 수준 이상으로 늘어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슈퍼에서 파는 1만~2만 원대 상품을 내놓을 수 없어 '보급형' 상품이 될 수도 없다. 1만 원 아래 저가부터 수천만 원까지 있는 컨벤셔널 와인과 비교하면 내추럴 와인은 가격 범위가 좁은 편이다. 3만~4만 원에서 출발해 20만~30만 원 선까지가 대부분이다. 정 대표는 내추럴 와인을 그래서 '니치(틈새) 시장' 품목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생산 과정만 봐도 노동력 투입 대비 높은 이윤을 낼 수 없는 구조라, 대기업이 진입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전망은 밝다. 건강이 식문화에 중요한 키워드가 되면서다. 최 대표는 "내추럴 와인은 열풍 혹은 버블이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사람들이 건강한 음식을 찾는 이상 내추럴 와인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내추럴 와인, 유기농 와인, 비건 와인 등 전체 친환경 와인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성장하고 있다. 대규모 주류전문매장인 '와인앤모어'도 올해 3분기 누적 친환경 와인(350여 종) 매출이 전년 동기보다 32% 늘었다. 더군다나 생산자들 역시 친환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국내에서는 한식 파인 다이닝 확산세도 호재다. 자연 발효의 맛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내추럴 와인은 매운 음식과 발효 음식이 많은 한식과 잘 어울려, 많은 셰프들의 선택을 받기 때문이다.
내추럴 와인은 이제 다양성 문화 중 하나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말한다. 정 대표는 이를 "컨벤셔널 와인은 더 많은 사람을 위해, 내추럴 와인은 더 다양한 맛을 위해" 공존하게 될 것이라고 표현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취향을 정교하고 또 확고하게 다져가는 과정에서 내추럴 와인이 한 선택지가 됐다"고 분석했다. 2020년 문을 연 내추럴 와인바 '피이아르(PER)'를 연 장경진 사장은 내추럴 와인 상점의 급증 현상을 카페와도 비교했다. "일명 '핫플' 카페에 사람이 몰리기도 하지만 동네 드립 카페를 찾는 마니아도 있고 다양하잖아요. 내추럴 와인도 그렇게 되면서 (모두가 접할 수 있는) 문화처럼 자리 잡아 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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