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빈 미술사박물관 소장품 전시
어두운 조명 아래서 금발 곱슬머리를 어깨로 늘어뜨린 어린 공주가 화폭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관람객을 바라본다. 빛나는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면 공주가 금방이라도 입을 벌리고 말을 걸어올 것만 같다. 옷차림을 간단한 터치로 표현한 덕분에 얼굴은 더욱 도드라진다. 공주의 표정에는 화가의 애정이 듬뿍 담겼다. 20대 중반에 궁정화가가 된 후 평생 왕가의 얼굴들을 그렸던 17세기 스페인의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대표작 ‘흰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가 한국에 왔다.
15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에 큰 영향력을 미쳤던 명문가이자 열렬한 예술 후원자였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집품을 볼 수 있는 특별전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이 이달 25일부터 내년 3월 1일까지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다. 한국과 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전시로 빈 미술사박물관이 소장한 왕가의 수집품 중 회화와 공예, 갑옷, 태피스트리 등 96점이 전시된다. 이 중 91점은 국내 첫 전시다. 빈 미술사박물관은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집품을 한 곳에 보관하기 위해 지은 곳이다. 첫날 개막식에 참석한 알렉산더 샬렌베르크 오스트리아 외무부 장관은 “이것은 (빈의 작품들에 비하면) 티저(맛보기)다”라고 강조했다.
합스부르크 왕조가 장기간 유럽에 군림하면서 각지에서 예술품을 수집했던 터라 전시도 시대순에 따라 5부로 구성됐다. 전시품들은 1508년 막시밀리안 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오르는 시기,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이 암브라스 성에 수집품들을 진열하기 위한 전용관을 지었던 시기, 그 이후로 200여 년 이상 이어진 명화 집대성 시기 등으로 나뉘어서 관람객들을 만난다.
예컨대 나폴레옹 초상 건너편에는 그의 맞수였던 프란츠 2세의 7세 때 초상이 걸렸다. 그의 할머니이자 오스트리아의 국모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제작을 의뢰한 초상화에는 당시 신지식을 상징하는 지구본이 담겼다. 양승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손자가 오스트리아의 미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잘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서 꼭 챙겨봐야 할 작품으로는 테레사 공주 초상과 함께 그리스 신화의 한 장면을 극적으로 표현한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주피터 그림이 첫 손가락에 꼽힌다. 유럽의 여러 명문가와의 정략결혼으로 가문의 지배력을 확장했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급기야 근친혼까지 거듭해 유전병을 앓았다. 21세의 나이로 숨진 테레사 공주의 경우 어린 시절부터 성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초상이 남아 있는데, 유전병에 따른 외모의 변화가 뚜렷하다. 이번에 국내를 찾은 벨라스케스의 테레사 공주 초상은 3세 때로 유전적 특질이 나타나기 전의 모습이다. 루벤스의 '주피터와 머큐리를 대접하는 필레몬과 바우키스'(1620~25년경)는 바로크 미술 거장의 솜씨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특별전에서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실제로 착용했던 전신 갑옷을 비롯해 뛰어난 공예품들도 만날 수 있다. 야자열매를 금, 은으로 장식한 야자열매 주전자가 대표적이다. 양 연구사는 “합스부르크 사람들은 예술이 중요한 자산이라는 것을 굉장히 잘 알았다"며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제 없어졌지만 그 소장품들은 여전히 600년의 역사를 빛내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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