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제 국가, 내각제보다 강한 통제 권한 보유
美 의회, 의회심사법 통해 행정부 시행명령 견제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시행령 마련 등에 있어 우리의 이해가 최대한 반영될 수 있도록 각급에서 심도 있게 협의해 나가자."
지난 6일 박진 외교부 장관이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대사와의 면담에서 나눈 대화 내용이다. 박 장관은 골드버그 대사에게 IRA에 대한 한국의 우려를 전하고 시행령을 통해 해결방안을 모색하자고 제안했다. 미 재무부가 IRA 시행령 제정에 앞서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있다는 점을 활용해 우리의 이해를 최대한 반영하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시행령을 통한 해법에는 다소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다음 달 8일 중간선거에 앞서 IRA를 통해 지지율 반등을 노리는 상황과 별개로, 미 의회가 행정부의 시행령이 모법에 어긋날 경우 이를 거부할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IRA는 세액공제 조항에 '북미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로 명기하고 있는 탓에 시행령으로 재량을 발휘할 폭이 상당히 좁다. 이재묵 한국외대 교수는 "설사 미국이 한국의 요구를 반영한 시행령을 통과시키더라도 의회에서 문제를 제기한다면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구조"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시행령 통치가 미국에선 의회의 결정에 따라선 가로막힐 수 있다는 설명이다.
美·佛 등 대통령제에선 의회가 '통제권한' 보유
한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시행령 통치'를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서는 어떻게 통제하고 있을까. 이해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24일 국회 입법조사처로부터 제출받은 행정입법 해외사례에 따르면, 우리와 같이 대통령제를 채택한 국가가 의원내각제 국가에 비해 의회의 행정입법에 대한 통제권한을 상대적으로 강하게 보장하고 있다.
미국에선 의회가 행정입법을 사전에 심사하도록 한 의회심사법(Congressional Review Act)이 있다. 상·하원이 합동으로 거부 결의 후 대통령의 재의 요구에도 양원이 재차 거부할 경우, 이를 사실상 폐지할 수 있도록 했다. 합동 거부 결의가 아니더라도 의회의 거부 결의는 행정부에 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 지난해 바이든 행정부가 직원이 100명 이상인 민간기업에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의무화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하자, 미 상원은 거부 결의를 한 뒤 연방대법원이 무효 판결을 내려 행정명령이 철회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프랑스는 입법영향평가를 통해 의회가 행정입법에 대해 간접 통제할 수 있도록 한다. 입법영향평가는 의회가 정부 제출 법률안에 대해 반드시 거치는 절차로, 의회가 주도해 국민 의견을 수렴하는 방식이다. 미국에 비해선 통제권한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의원내각제 국가인 영국과 독일, 일본은 행정부와 입법부가 일원화돼 있기 때문에 행정소송 등 사법적 절차로 행정입법을 통제하고 있다. 영국과 독일은 의회가 행정입법을 사전에 심사하고 거부까지 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지만, 일본은 사후 승인 또는 보고만 규정돼 있어 의회의 통제권한이 가장 약하다.
전문가 "통제장치 강화 필요... 여야 합의 선결돼야"
한국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만큼 입법부의 통제장치 강화에 대한 목소리가 많다. 이를 위해서 여야 간 '정치적 합의'를 선결조건으로 지목하고 있다. 이재묵 교수는 "행정입법을 사법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지만 판결이 빠르게 나올 수 없는 한계가 있다"며 "입법부에서 여야 합의를 통한 정치적 해결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장승진 국민대 교수는 "본회의 의결 시엔 반드시 시행령을 수정하도록 강제하는 등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여당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해식 의원은 "미국의 경우 의회심사법을 통해 의회가 행정입법에 대하여 거부 결의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대통령제 국가로서 국가권력의 집중과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인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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