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 장편소설 '이국에서'
철저한 고립으로 또렷해진 과거의 삶
신학 전공 작가의 철학적 문장 여전해

게티이미지뱅크
유력 정치인의 비리 스캔들이 터졌다. 마침 선거기간인데 빠져나갈 묘수도 없다. 정치인의 측근은 '꼬리 자르기'라는 진부하지만 탁월한 책략을 내놓는다. 일이 틀어진 건 그 꼬리가 자신이 되면서다. 보스(정치인)는 모든 혐의를 떠안고 약 6개월의 선거기간 동안 사라져 달라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
현실 정치판 뒷얘기 같다. 치열한 복수전의 정치 느와르 영화 몇 편도 떠오르는 이 설정은 이달 출간된 장편소설 '이국에서'의 시작점이다. 대산문학상·현대문학상·동인문학상 등을 받은 이승우(63) 작가가 2018년 5월부터 약 10개월간 문학잡지 '악스트(Axt)'에 연재한 작품을 엮었다. 작품 초반부까지는 떠날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이 이국에서 느끼는 고립감과 혼란, 배신감 등을 조명한다. 하지만 서사가 전개될수록 정치 느와르 영화와는 전혀 다른 결이 보인다. 오히려 죄와 사랑, 구원 등을 고심하며 인간의 내면을 파고 드는 작가의 본색이 진하게 묻어난다.
주인공 '황선호'가 도피처로 택한 곳은 가상의 국가인 '보보민주공화국'이다. 두 대륙, 세 도시를 경유해 26시간 만에 간 그곳에 한국인 이민자는 없다. 관광객도 거의 없다. 유럽의 식민지배 이후 내란을 겪고 군부독재가 계속되는 혼란한 정세 탓이다. 감쪽같이 숨기에 이보다 나은 곳이 없다. '강진'이라는 위장 신분도 보호막이 됐다.
문제는 보보 정부가 '외부인 추방' 결정을 내리면서 시작된다. 사실상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인 출신 수상의 명령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국민안전국을 통해 체류 허가증을 새로 받으면 된다고 하지만 실제 허가증을 받은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에 돌아갈 수도 없고 도움도 받기 힘든 '황선호'가 스스로 살아남는 과정은 곧 그의 자기 극복기 혹은 자기 구원기가 된다.

신작 장편소설 '이국에서'를 낸 이승우 작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구원은 이번 작품에도 주요한 주제다. 그 바탕에는 성찰이 있다. 주인공은 보보에 도착해 몇 날 며칠 술만 퍼마시다 병원 신세를 진 후에야 "완전한 무위의 시간"을 제대로 마주한다. 철저한 고립은 성찰의 시간을 선사한다. 가령 배설물 천지인 길거리에 짜증내는 그에게 하늘을 보고 걸으라는 현지인의 충고는 과거를 또렷하게 다시 보게 한다. "발밑의 현실이 하늘의 추상을 이긴다. (…) 중요한 것보다 시급한 것을 먼저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치이다. (…) 시급한 일이 끊이지 않으면 중요한 일은 영원히 미뤄지고 끝내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문득 떠나온 도시에서도 자신이 '똥과 똥이 널린 땅'에서 눈을 들지 못하고 살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보보에서 맺은 인연들은 그를 성숙시킨다. "네가 원하는 일을 해라. 남이 원하는 일이 아니라"는 생전 어머니의 조언을 그제야 받아들이게 된 것이 결정적 변화다. 본 적 없는 생부의 삶을 우연 같은 필연으로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전환점이다. 그와 연결된 이들과 교류하며 점차 외부인 '황선호'는 보보 내부로 녹아든다. 아버지와 5·18민주화운동, 과거 보보에서 벌어진 비슷한 사건들을 알면 알수록 그는 더 바짝 보보로 당겨진다. 작가는 이를 통해 개인의 삶이 얼마나 깊이 역사와 섞이는가를 보여준다.

이국에서·이승우 지음·은행나무 발행·356쪽·1만6,000원
'이국에서'는 반복되는 배척의 역사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길거리 버스킹을 하다가 행인에게 폭행당한 '외부인' 등은 팬데믹 시기를 지난 우리에게 익숙하기까지 한 장면이다. "모두들 사연이 있어요. 대를 이어 살아온 자기 나라를 그냥 떠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살 수 없어 떠났지만 이 친구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떠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예요. (…)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곳에 기어이 이르려고."
묵직한 주제지만 지루하지는 않다. 섬세한 문체로 삶의 철학을 써온 작가의 내공일까. 신학 전공 작가의 철학적 문장들을 읽는 즐거움도 여전하다. "그를 추동한 것은 성찰이 아니라 모방과 관성이었다. 모방과 관성에 따라 반사적으로, 또는 경쟁적으로 그저 주워 담았을 뿐이고, 그러니까 그의 자루에 정말로 쓸 만한 것이 얼마나 들어 있었는지는 말할 수 없다." "때때로 믿음은 우매함과 구분되지 않는다. 혹은 믿음이 분별의 눈을 가려 우매함에 빠지게 한다." 한 문장씩 곱씹다 보면 마지막 장에 이른다. 그리고 생각한다. "발밑의 현실이 하늘의 추상을 이기는" 지금의 삶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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